누가복음서묵상일기 292 - '왜 화가 났을까?'

2025. 5. 12. 05:00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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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15:25~32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보았다.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고 편안하게 만져주시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때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이 힘들고 복잡하기도 하죠. 때로는 남들처럼 그냥 쉽게 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큰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복은 아버지 집에 머물러 있는 것, 그 분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치리할 때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다른 잡다한 것들로부터의 해방임도 기억하셔야 해요. 오늘도 주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는 둘째 아들의 귀환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첫째 아들의 이야기에서 신앙의 또 다른 단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기뻐서 잔치를 엽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그 기쁨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죠.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왜 화가 났을까요? 아버지가 둘째 아들만 사랑해서요? 아니면, 돌아온 자를 환영한 잔치 때문일까요?

첫째 아들이 화가 난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는 이렇게 아버지에게 말하죠.

누가복음서 15:29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자신은 성실히 살아왔고, 항상 아버지 밑에 있었고, 명령 하나 어기지 않았다는 거죠. 그런데 멋대로 살다 돌아온 둘째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까지 열어주는 걸 보니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아들을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간혹 둘째 아들에게만 아버지가 재산을 나눠준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는데,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죠. 

 

누가복음서 15: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첫째 아들도 이미 자신의 몫을 받은 상태입니다. 게다가 그는 그 받은 유산을 까먹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재산을 불렸을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아버지 집에서 계속 살았으니 돈을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그는 지금 왜 억울하다고 느낄까요?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버지 밑에서 순종하며 일하고도 아무 대접 못 받았는데, 저 멋대로 산 놈은 돌아오자마자 잔치를 받아?”

이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 밑에 있었던 것이 손해였다는 감정이죠. 나만 참고, 나만 일하고, 나만 마음대로 살지 못했다는 마음입니다. 어쩌면 자신도 아버지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반증인지도 몰라요.

저는 이 첫째 아들의 이야기가 불편합니다. 그 이유는 내 안에도 그 첫째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대로 살지도 못했는데…"  
"나는 욕심도 못 부렸는데…"  
"나는 그렇게 내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했는데…"

이런 생각들이 내 속에서 올라올 때, 나는 예수 믿는 것이 손해인 것 같고, 내가 욕심대로 못 사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부럽고, 양심적이지 않아서 더 잘 나가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죠. 왜 나만 항상 참아야 하고, 왜 내 욕심은 억제해야 하며, 왜 남을 더 낫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지, 그런 모든 것이 손해라는 생각이 들죠.

제가 존경하는 신학자 헨리 나우웬의 저서 가운데 [탕자의 귀향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큰아들 편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큰아들의 비극은 그가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의무감으로 봉사했지만, 마음속에는 끊임없는 불만과 질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에게 아버지의 집은 사랑과 환대가 넘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노고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억압적인 공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이미 마음으로는 집을 떠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믿음은 억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다는 것은 가장 안전하고 복된 자리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구속(拘束)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기쁨은 사라지고 억울함만 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갈등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남모를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 그는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 번이란 숫자가 아니라 '끊임없이'라는 뜻이죠. 그러나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고린도후서 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아버지도 첫째 아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서 15:31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잘해서 지금까지 왔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렇습니다. 아버지 밑에 있었기 때문에 안전했고, 풍성했고, 존귀했던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못 사는 게 은혜입니다. 내 욕심대로 못 하는 게 복이에요. 아버지 집에 머무는 것이 이 세상 가장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주님의 그늘 아래 있을 때 가장 빛나죠. 내가 받은 은혜가 이미 크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오늘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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