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묵상일기 297 - “하나님, 저는 당신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2025. 5. 18. 13:11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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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16:19~23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우리는 지금 누가복음을 새롭게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새롭게”라는 말이 꼭 다른 해석이나 독특한 접근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성경은 수많은 묵상가와 신학자를 통해 깊이 있게 풀어졌고, 교회의 전통 속에서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매일 새롭게 읽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오늘, 내 삶에서 말씀 한 줄이 마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새로움은 삶에 닿는 말씀,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은혜의 발견이죠. 가장 귀한 말씀은 선포되는 말씀이 아니라, 공감되고, 우리 일상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내 고백이 되고, 내 삶이 되고,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될 때 비로소 말씀은 살아 움직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6장 19절부터 23절까지는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죠. 사실 이 본문은 참 묘합니다. 처음엔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자의 운명이 바뀐 이야기 같죠. 한 사람은 화려한 인생을 살다 지옥에 떨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비참한 생을 살다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정작 이 이야기에서 부자가 왜 지옥에 갔는지, 거지가 왜 천국에 갔는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부자는 나쁜 짓을 했다는 언급도 없고, 나사로는 선행을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착한 사람은 천국, 나쁜 사람은 지옥’이라는 전형적인 구도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곱씹을수록, 단순한 윤리적 결론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깊은 신비가 담겨 있음을 느낍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우리가 찾아보도록 하죠.


1. 이름이 없는 부자, 이름이 있는 거지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극적인 대비를 보여주십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헌데를 핥는 개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헌데는 살갗이 헐어서 벗겨지고 상한 상처를 말하죠. 이 단어는 표준말이지만 우리가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어쨌든 그 형색이 초라하고 비참했던 것은 분명하죠.


그런데 여러분, 이 이야기에서 이상하거나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눈에는 유독 좀 특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사로’라는 이름이에요. 이름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런데 비유 속에서 등장하는 부자는 그저 ‘어떤 부자’로 되어 있습니다. 굳이 이 비유의 주인공을 꼽자면 부자도 스토리 한 축을 담당하는 사람인데 그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다만 거지에게만 콕 집어서 이름이 주어지죠. 


혹시 기억하실까요?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부터 많은 비유 이야기를 묵상했습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와 잃었다 다시 찾은 양, 그리고 드라크마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런데 오늘 비유에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모든 비유 중, 개인의 이름이 등장하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왜일까요? 왜 예수님은 이 가난한 병든 거지에게만 이름을 붙이셨을까요?


이것은 단지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름을 붙이신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Lazarus)’는 히브리어 ‘엘리에셀’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이런 식의 두 이름이 사용되었죠.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은 사울이고, 헬라식 이름이 바울이죠. 


그런데 이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에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식으로는 엘리에셀이라고 했죠? 히브리어로 [엘]은 주로 하나님, 혹은 강하신 분을 뜻합니다. [엘로힘], [엘샤다이] 등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같죠. 그리고 [아자르]는 ‘돕다’, ‘구원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예수께서 이 사람에게 이름을 붙이시면서 알려주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는 세상에서는 버려진 자였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기억된 자라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천하고, 아무리 소외되어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인생과 그렇지 못한 인생이 있음을 알려주시는 거죠.


2. 천국과 지옥,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이야기는 죽음 이후로 넘어갑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 장면을 보며 사람들은 흔히 말하죠. “그래, 결국 가난한 사람이 복을 받는 거야.”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의 나라가 부자는 안 되고, 가난한 자는 된다는 식의 생각에 빠집니다. 조금 더 도전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 나라는 선하고,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 가는 곳이며, 반대로 악하고 잘못된 사람은 못 가는 곳으로 생각하죠.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천국 가는 것이 마땅하고, 주님을 모르는 이들은 지옥에 가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는 가난했기 때문에 간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어떤 선한 일을 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말도 없고, 부자를 원망하지 않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반대로 부자에 대해서도 어떤 악한 행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저 자기만 알고 살았을 뿐이죠. 그저 자기 집 앞에 누가 쓰러져 있든, 누워있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어쩌면 집 앞에 거지가 늘 있었음에도 쫓아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자는 어느 정도 관용을 보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거지를 용납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복음의 메시지를 만나게 됩니다. 천국은 우리의 의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들어가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Without God’s grace, man is nothing.")


나사로가 천국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것은 그의 ‘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3.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가 되라.


우리는 누가복음 16장에 들어서면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해석이 어려운 본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이미 묵상을 통해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말씀을 새롭게 묵상했죠. 그 대의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삶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거기에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있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내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잊어버리면 마치 내가 잘 나서 가진 것처럼 생각하게 되죠. 그것을 예수님은 낭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낭비하는 거죠. 그것을 낭비하고 제대로 쓰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큰 것을 우리에게 맡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돈에 욕심이 많으십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돈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돈을 나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오히려 돈이 우리 삶에 중요한 나눔의 도구라고 말씀하시죠. 그러나 어떤 귀한 영적 도구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잊으면 낭비하게 됩니다. 그 낭비는 우리를 돈의 노예가 되게 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돈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누구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죠. 그런데 황금을 돌같이 본다고 우리가 그 재물, 황금, 돈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거예요. 잃어버렸다 찾은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그러죠. “내 것은 다 너의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은 다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죠.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손에 쥐지 않아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필요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면 주실 것도 알기 때문입니다.


본래 내 것은 없었습니다. 다 주님이 주신 것이죠. 그래서 내 것을 움켜 잡을 필요도 없어요. 욕심낼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처럼 주님 안에 붙어 있으면 언제든지 주님의 공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녀라면 언제든지 채워주실 것을 알기 때문이죠. 욕심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주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그것이 바로 욕심이죠. 


오늘 비유는 단지 천국과 지옥의 구도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사로가 천국에 간 이유는 단지 그가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부자는 단지 부유했던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상황을 만들지 못했어요. 


지난주간 매일 아침 묵상했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은혜의 통로가 되라는 말씀 아니었습니까? 그러면 주님이 채우신다는 말씀을 우리는 계속 나누지 않았습니까? 왜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까? 남을 돕고,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선한 일이어서요?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반쯤 아시는 겁니다. 우리가 남을 돕고 남에게 은혜를 나누는 진짜 이유는,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빈손을 채우시고, 우리의 나눈 그 빈 자리에 은혜를 부으시는 도움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이 주님의 도우심입니다. 나를 위해 계속 일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 은혜의 통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곁에 있던 고통받는 자를 보지 못했고, 그에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지 선행을 베풀지 않았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돕는 손길 위에 축복하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는요? 본문을 자세히 보면, 나사로는 단지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과 심각한 사회적 배제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피부병은 저주로 여겨지는 병이었죠. 사회적 차별과 격리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는 그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였음을 암시합니다. 이 장면을 우리는 단순한 이야기로 넘길 수 없습니다. 그의 고통은 개인의 선택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짊어져야 했던 현실적 한계와 사회 구조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사로의 삶에 쉽게 ‘불쌍함’이라는 감정을 던지려 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안 됐다고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동정심을 넘어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사로를 바라보십니다. 오히려 그 아픔, 그 슬픔, 그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시선을 받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쩔 수 없는 고난에 낙심하지 마세요. 선천적인 문제로 낙담하지 마세요.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은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그의 이름을 아셨고, 그가 죽은 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하심으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귀한 자가 되는 반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속 나사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지도 못했고, 자신을 도울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그의 영원을 바꾸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영광스러운 축복은, 높은 자리나 큰 재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축복, 그것이 가장 귀한 복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도우실 그 자리에 서 계십니까? 내 삶의 자리에서 나의 재능, 나의 실력, 나의 권리조차도 주님이 주심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계십니까? 늘 하는 일, 일상의 반복되는 시간, 심지어 숨을 쉬는 것조차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주님께 지금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혹시 주님의 도움보다 세상의 도움, 물질과 권세의 도움을 더 바라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게 물질의 노예가 되는 비결임을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나 자신도 충분히 잘하니 하나님은 필요 없다고 자신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이게 교만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도우실 자리가 없어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결단합시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는 단 하루도 온전히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속으로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당신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이 다 나를 잊는다 해도, 당신은 나를 기억하시고 도우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의 이름도, 저의 삶도, 당신의 손으로 붙들어 주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자리에 늘 서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주고 싶어서 가슴 졸이는 일을 하십시오. 내 것을 나누는 일, 스스로 가난하고 낮아진 자리, 갖은 조롱과 핍박에도 누구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리, 그곳에 주님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이 귀한 갈증을 마음에 품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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