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묵상일기 48 - "어차피 나는 잘 될 것을 알아"

2023. 6. 22. 06:50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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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13~14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는 뜨거웠던 대지를 적셔준 비 때문에 조금은 시원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오늘 아침도 선선한 바람이 참 좋습니다. 시원하고 향기로운 바람이 내몸을 감싸듯 성령의 바람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의 서로 사랑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이루어지는 전제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말하죠. 이 문장에 대해 우리는 조금 숙고해야 할 것이 있어요. 제가 계속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와 전제로 이 성경을 읽느냐에 따라 해석이나 묵상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이죠. 그래서 나의 전제된 감정 상태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그것을 세계관이라고 하죠. 이것을 잘 설정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죠. 그래야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현대 기독교, 특별히 한국교회의 신앙에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요. 그것은 세계관이 경직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타인, 즉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갖는 자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대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물론 한국교회만 그런 것은 아니고 한국 사회 자체가 대결과 진영논리에 갇혀 있는 측면이 많죠. 그래서 세상, 혹은 나와 다른 부류에 대해 날을 세웁니다.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읽다보니 오늘 본문처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말을 마치 세상이 우리를 탄압하거나 시기 질투한다는 식으로 읽는 경향이 많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한다는 말씀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십니까?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싫어한다고 느끼시나요? 그들이 복음을 싫어하고 예수를 싫어해서 우리를 핍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이는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요.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음을 저는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다만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전할 뿐이니 저의 말이 진리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싫어하는 것은 복음이라기보다 그 복음을 전하면서 위선을 자행하는 그런 자들이지 않을까요? 예수를 싫어해서라기보다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 때문 아닙니까? 제가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할 때 많이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중국은 기독교를 싫어한다고 말이죠. 그래서 탄압한다고요. 그런데 이게 좀 과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국정부가 싫어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정부에 적대적이거나 내부분열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교회나 외부의 교육(중국에서는 설교를 외세의 압력으로 인식하는 측면이 강하죠)으로 인한 내적 분열이나 소수민족 분열로 판단하는 경우가 훨씬 큽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말의 의미를 저는 실질적인 적대감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구절의 내용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이어 말하죠.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는데 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사랑을 알았는데 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까?
 
우리는 가끔 어떤 물건이나 프로그램의 사용법을 다른 이에게 가르쳐 줄 때가 있죠. 저는 컴퓨터를 가르쳐줄 때 느끼는 것이 있어요. 이런 저런 기본을 가르쳐주고 혼자 할 수 있도록 맡기면 어김없이 연락이 옵니다. 뭐가 잘 안 된다는 거죠. 그때 저의 태도가 어떤지 아세요? 이미 저는 그것이 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죠. 되는데 그가 모른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가르쳐 주는 거죠. 그런 질문에 흥분하지도, 그렇다고 당황하지도 않아요. 실제 그 문제를 대하면 간단하게 풀리는 문제가 대부분이죠. 반면 모르는 사람은 열 받죠. 가르쳐주는대로 했는데 안 된다고 여기죠. 가르쳐주는 이의 실력을 의심하고 더 나아가 제품의 하자까지 논합니다. 때론 화를 내죠. 이것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가 강조하는 것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을 탓하지 말라는 거죠. 이것이 관용입니다. 이건 그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봐주는 것이 아니에요. 이긴 자의 너그러움이고, 가진 자의 여유입니다. 아는 자의 인내이고 큰 자의 포용이에요.
 
우리는 알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아름다운 처소로 인도하실 것을요. 나의 일은 결국 잘 될 것이고, 나의 광야길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가는 길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고, 내게 주어진 시간 속에는 그분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말이죠. 그런 이들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 모든 일들 또한 아름답고 보배로운, 거룩하고 향기로운, 주님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가는 길의 도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앎이 여러분을 이끌거예요. 그 앎이 여러분의 길을 더욱 밝게 빛낼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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