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묵상일기 47 - 시기는 나의 영성을 갉아먹는 가장 큰 병입니다.

2023. 6. 21. 06:50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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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11~12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어서 자기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는 동생을 쳐 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창밖에 빗소리가 들리네요. 갑작스런 무더위를 식혀주는 비 같습니다. 우리의 성에는 차지 않지만 그렇게 자연의 순리에는 적절한 하나님의 질서가 있는 법입니다. 비록 아픈 일도, 슬픈 일도, 힘겨운 일까지 멈추지 않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질서가 운행하시며 적절한 위로와 은혜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느끼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시금 같은 본문으로 묵상합니다. '미움', '서로 사랑의 의미'를 이 본문에서 묵상한 바 있습니다. 오늘은 순수하게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유명하죠.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동생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 더 나아가 왜 하나님은 가인보다 아벨을 더 사랑하셨는지, 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의문이 꼬리를 무는 그런 이야기죠.

 

지금까지 알려진 이야기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억하심정,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어떤 이들은 가인의 제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하죠. 그가 드린 제사는 땅의 제사이고, 아벨의 제사는 양의 피라는 다소 억측에 가까운 해석이 주를 이룹니다. 이는 당연하게도 가인은 땅을 일구고, 아벨은 목축업을 했기 때문이죠.

 

저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보다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조심스러운 해석을 해 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될지도 모르겠다 싶은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심각한 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자 드리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인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그의 이름 가인의 뜻이 '득남, 모든 것을 얻었다'라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는 장자로 아버지의 소산을 넘겨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장자의 특권을 누리는 자였죠. 반면에 아벨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의 이름 아벨은 '허무'라는 뜻이죠.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가인만큼 존중받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목축업을 하게 된 것은 차별의 결과입니다. 목축업은 집이 아니라 광야를 떠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목동이었던 것과 같죠. 이는 우리에게 목자에 대한 인식이 좋아서 그렇지, 사실 양치기는 집에서 쫓겨난 존재나 다름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양치기는 거짓말쟁이라는 인식이 있었겠어요? 

 

문제는 그들의 직업도, 그들의 특권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인의 제사에는 어떤 특별한 문제점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자신의 직업에 맞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에서 문제 삼을 것은 없어 보이죠.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어떤 오해가 생길 만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제사를 묘사한 히브리서의 기록이죠. 히브리 기자는 아벨의 제사가 더 나은 제사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가 드린 양의 피가 더 나은 제사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제사를 차별하실 이유가 없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가인의 제사에서 특별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가인이든, 아벨이든 그들의 제사를 다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제사를 '똑같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차별 없이' 제사를 받으셨다는 거죠. 제가 강조하고 있는 '똑같이' '아무 차별 없이'에 주목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인에게는 너무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장자로 자랐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갔고, 모든 것에서 자신이 가장 우선순위였죠. 동생 아벨은 그저 엑스트라일 뿐이었습니다. 오직 주인공은 자신뿐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제사와 동생의 제사를 똑같이 받으셨습니다. 아니, 자신에 비하면 너무도 하찮은 동생 아벨의 제사를 나의 귀하디 귀한 제사와 동등하게 취급하신 것입니다. 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이게 뭔가 싶었을 거예요. 지금까지 나를 대하던 세상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모습에 그는 당황했을 겁니다. 그 당황은 하나님의 태도가 공평함을 넘어서 아벨에게 더 우선권을 두는 쪽으로 발전했을 거예요. 내가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하는 공평은 이미 나를 차별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변하는 것이 우리 안에서 기생하는 시기와 질투의 특징이죠.

 

시기는 나의 영성을 갉아먹는 가장 큰 병입니다. 남을 축복하지 못하면 나도 축복받지 못합니다. 남의 일에 기뻐할 수 없으면 나의 일에도 기뻐하지 못하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입니다. 어떤 생명이든 그 생명은 나와 같은 생명이죠. 그 생명이 미움받으면 나도 미움받는 것이고, 그 생명이 차별받으면 나도 차별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잘되어야 하고 같이 낙원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이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이유죠. 서로 사랑의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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