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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후서묵상일기

고린도후서묵상일기 66 - 감사를 잃으면 인생도 잃습니다.

고린도후서 8:1~7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고,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디도에게 청하기를, 그가 이미 시작한 대로 이 은혜로운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완수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뛰어납니다. 곧 믿음에서, 말솜씨에서, 지식에서, 열성에서, 우리와 여러분 사이의 사랑에서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로운 활동에서도 뛰어나야 할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가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이었더라고요. 이쯤 되면 추위가 불어 닥칠 만도 한데 그닥 춥지 않으니 절기도 잊게 하네요. 옛 속담에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설에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된다는 의미의 말이죠. 사실 추위를 타는 제게는 요즘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좋기는 한데 그게 다 좋은 것은 아닌가 봅니다. 추울 때 추워야 잘 되는 것도 있는 거죠. 우리의 인생에도 깊은 골짜기가 있고 높은 산이 있죠. 뭐가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이 둘이 다 있어야 좋다는 것은 알 것 같아요. 길은 굴곡이 있어야 안 지루하고 산은 높고 낮음이 있어야 오를 맛이 납니다. 그러니 깊은 골짜기에서는 높은 산을 기다리고, 아픈 시련 가운데서는 환히 웃을 기쁨을 기대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울은 8장에 들어서서 헌금 이야기를 합니다.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을 소개하고 있죠. 주로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등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남을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모양입니다. 더 특별한 것은 넉넉하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베풀었다는 것이죠. 2절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친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묵상해 온 감사와 기대, 기쁨과 희망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말을 생각나게 하죠. 사실 시련을 겪을 때 기쁠 일이 뭐가 그리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시련 속에서도 기대를 버리지 않았기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죠. 시련에 몰입되지 않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새롭게 주어질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기를 멈추지 않았기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참 놀랍죠? 지난 주일, 우리는 좋은 생각과 좋은 상상, 그리고 기대의 끝에 감사가 있다는 말을 나눴어요. 이들도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 좋은 기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상상하는 그 마음속에서 감사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감사의 표현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죠. 그 감사의 표현은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구제를 하고, 심지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까지 자원하며 남을 도왔어요. 그리고 그 교회의 모습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설명합니다. 또한 동참을 요구하죠. 그 일을 은혜로운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회의 일원으로서 고린도 교회도 구제하는데 나서야 한다는 권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특이한 점이 있어요. 고린도 교회는 본래 구제에 익숙한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과 핍박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고린도 교회는 헌금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구제 활동에 나섰죠. 이를 바울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자신이 주도했으니까요.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헌금을 독려합니다. 여기서 현재 고린도 교회가 남을 위해 헌신하고 구제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죠.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어요.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가 구제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국한하지 않아요. 바울은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헌금하고 구제하는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께 향한 감사의 표현임을 말하고 있죠. 그리고 그 감사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은혜 주시는 통로가 됨을 설명합니다. 마치 사르밧 여인의 기적처럼, 감사의 제사로 나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로 채우심을 설명하며 고린도 교회에 그 은혜를 경험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제는 어려운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감사가 넘쳐서 하는 것입니다. 내 것의 전부를 드려도 감사했기 때문이죠. 그 감사에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우십니다. 그런데 어떤 구제는 어려운 사람, 도와야 할 사람이 있어서 돕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고, 심지어 그들과 다른 나를 드러내며 우월감에 빠지기도 하죠. 이를 '시혜적 태도'라고 하죠. 한국교회가 수많은 나눔과 기부를 하면서도 욕먹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시혜적 태도 때문입니다. 베풀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태도죠.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 감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잃는 순간, 그들이 어려움에 빠지고 여러 유혹에 노출되며 흔들리고 싸우고 갈등을 빚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이죠.

 

감사를 잃으면 인생도 잃습니다. 감사를 잃으면 흔들려요. 많은 문제들과 갈등, 어려움과 번민들이 생기는 이유는 감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해서 나의 것을 다 주고도 기뻐할 수 있는 그 감사를 잃으면 우리는 다투고 싸우고 경쟁하고 분노하죠. 불안과 두려움, 나만이 손해 보는 것 같은 불만과 모든 것이 미워지는 분노는 감사가 사라지고 감사의 표현이 메말라서입니다.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를 입에 달아야 하고요. 감사의 표현을 서슴없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의 제사와 나눔은 감사하는 자들의 결과물이죠.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그것만을 하나님이 흠향하시죠. 그리고 그 감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가 되어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흐르게 만들죠. 감사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감사를 더해 주시고,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감사로 나누는 자에게 주님은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도록 채우십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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