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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후서묵상일기

고린도후서묵상일기 64 - 나쁜 교관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7:11~13a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편지한 것은, 남에게 불의를 행한 사람이나, 불의를 당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여러분의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환히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오늘, 주변에 깃든 감사한 일들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아름다운 경험을 하는 하루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보낸 눈물의 편지로 변화를 일으킨 이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 축복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프고 괴로운 일들을 적대시하지 않고 과감하게 끌어안아 자신들의 성장에 지렛대로 삼았다는 점이죠. 우리는 직언, 요즘 말로 팩폭이라고 하죠. 옳은 말, 혹은 맞는 말들을 접할 때 듣기 싫을 때가 있죠. 너무나 옳은 말이어서 더욱 가슴이 아프고 때론 상처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말을 적대시할 때가 있죠. 나에게는 내가 듣기 싫은 말이 곧 '틀린 말'이 됩니다. 내가 듣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옳든지 그르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신에게는 '맞는 말'이 되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만큼 객관적인 진리는 우리에게 없죠. 오로지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만이 진리인 세상에 삽니다.

 

그런데 자신의 변화를 이끌며 성장하는 이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아프고 쓰린 말을 성장의 도구로 삼죠. 심지어 틀린 말조차 스스로의 판단과 분별의 능력에 이용합니다. 그들의 성장에 쓰인 말들은 고운 말이 아닙니다. 다 아프고 괴로운 말들이죠. 그럼에도 그것을 선용할 줄 압니다.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는 매가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분깃점이 될 계기가 되는 매가 있기도 합니다. 물론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롭게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렸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죠. 감사한 것은 아픔을 성숙으로, 어려움을 능력으로 만드는 모든 이에게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채우신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변증 가운데 빠지지 않는 부분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느냐? 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주님 안에 선과 악이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죠.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저 또한 지식이 짧고 지혜가 부족해 이 부분을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믿음은 있어요. 그것은 어떤 것일지라도 끝내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점입니다. 어둠이 빛을 더욱 빛나게 한다면 어둠조차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시련이 더욱 하나님을 갈망하고 간절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한다면 그 시련조차도 보배로운 자산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악도 주님께 쓰임 받는지도 모릅니다.

 

나쁜 교관은 없습니다. 다만 교관이 나를 방해한다는 나의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교관은 나를 위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오직 나를 자라게 할 뿐이라는 믿음을 왜 우리는 상실했을까요?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할까요? 하나님은 과연 나에게 어떤 분이실까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면 어떨까요? 세상이 어떠해도, 누구 뭐라고 해도, 저는 이렇게 선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좋은 길로 이끄시는 분이다."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은 나를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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