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묵상일기 14 -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2022. 9. 8. 06:57묵상하는말씀/고린도후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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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23~24   내 목숨을 걸고서, 나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렵니다. 내가 아직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하늘을 보셨나요? 가을 하늘은 이런 것이다 말하는 듯 높고 푸른 하늘이 뛰어들고 싶을 만큼 맑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맑기를 간구합니다. 명절 연휴를 앞둔 목요일, 행복한 명절을 위해 기쁨을 예비하고, 감사를 장착하고 마음을 나눌 준비하는 복된 날 되시길 빕니다.

 

바울은 여행 계획의 변경을 빌미로 자신을 헐뜯는 이들을 향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계획이 바뀐 이유를 설명하고 이는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했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오늘 본문에서 강하게 자신의 진실성을 주장합니다. 그 표현으로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죠. 이런 표현은 우리에게도 익숙하죠?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는 표현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이런 표현을 많이 썼던 모양입니다. 때론 지극히 감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마치 최후통첩과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표현이죠.

 

그리고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가 자신의 편의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말하죠.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이런 표현에 우리는 조금 식상하죠.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그것을 다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덮어 씌우는 행태들을 우리는 종종 보기 때문입니다. 온갖 감정을 동원해 체벌을 하고도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괴롭힘에 가까운 스토킹을 하고도 사랑해서라고 변명하는 이들이 있죠. 23절만 읽으면 바울 또한 그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24절을 읽고서야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의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죠. 조금 느닷없습니다. 이 말의 뜻을 액면 그대로 읽자면 고린도 교인들을 바울이 좌지우지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왜 이 말이 갑자기 나왔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충 이런 그림이 그려져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애정이 많았습니다. 오랜 기간 머물며 고린도 교회를 세웠죠. 그리고 가장 믿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의 선교 여행에 후원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교회가 병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겁니다. 아끼고 사랑하던 이들이 잘못된 생각에 빠지고 일부는 교만해지고 또 일부는 세상 문화에 휩쓸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거죠. 그때 바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아니 만약 나라면 어떤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을까요?

 

서로 깊은 교제를 나누고 어려움을 같이하며 신앙의 동료로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을 헐뜯고 모욕하고 왜곡한다면 아마도 배신감이 들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나눴던 이들이 그 말씀을 곡해하고 다른 교리나 생각으로 남을 미혹한다면 화가 날 거예요. 바울이라고 달랐겠습니까? 그가 당장 쫓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그들을 혼내고 쫓아내고 저주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안 그러겠습니까? 화가 나고 감정이 상했는데요.

 

우리에게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 감정이 상하면 어떤 말씀도, 어떤 교리도 통하지 않죠.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영성훈련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감정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당장 그것을 해결하는 이들이 있죠. 감정을 폭발시키고 저주를 퍼부어야 마음이 시원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런 놈은 당해도 싸다는 합리화와 함께 온갖 자기감정을 다 쏟아 내죠.

 

감정이 있는 우리에게 감정이 생기는 것은 본능입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죠. 미움이 생기고 속상함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죄는 그 감정을 드러낼 때 일어나죠. 미운 감정이 드는 것은 감정이 없지 않고는 다스릴 방법이 없습니다. 미운데 어떡합니까? 그러나 그 미운 감정을 표현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감정을 다스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죠. 나쁜 감정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쉽게 흥분하기도 하죠. 좋든 나쁘든 흥분은 이성을 잃게 만드는 특성이 있죠. 그래서 흥분할 때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두고 평정심을 찾고 평안을 찾아야 하죠.

 

바울이 고린도에 즉각적으로 가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시간을 두고 고린도 교회를 객관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요. 이는 교회 공동체,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를 세운 목적이 누군가를 혼내고 정죄하고 벌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주고 소망을 나누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문제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렸던 거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다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잠시 시간을 가져 보세요. 나의 감정이 요동칠 때 잠시 기도할 시간, 호흡할 시간, 생각할 시간을 가져 보세요. 흥분은 이미 모든 상황이 결정된 것처럼 우리를 몰아가죠.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것 이면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 잠시 생각을 멈추고 지금껏 은혜 주신 주님을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손길을 떠올릴 시간이 필요하고, 이보다 더한 문제에서도 풀어나가게 해 주신 은혜를 다시금 느낄 시간이 필요하죠. 그렇게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시간을 가지세요.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 내 입으로 내뱉기 전에 꼭 시간을 가지세요. 기도의 시간, 묵상의 시간, 회개의 시간, 소망의 시간, 그 짧은 시간이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귀한 시간이 될지도 몰라요. 아무리 육상선수여도 달리기만 할 수 없듯이 우리도 쉬지 않고 달리는 생각과 감정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시시때때로 멈추고, 특별히 감정이 끓어오를 때는 더욱, 잠시 멈추고 나와 주님만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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