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9 - 나만큼 당신도 잘 살아야 내가 좋습니다.

2022. 5. 17. 06:52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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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5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아침은 좀 쌀쌀했는데 오늘은 새벽 공기가 따스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따스한 온기가 돌며 보다 너그럽고 보다 여유로운 기분으로 아침을 여시길 빕니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많이 들었던 말씀이고 아는 말씀이지만, 다시금 주옥같은 말씀으로 다가오네요. 정말 가슴에 콕 박히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이기적일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조금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은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을 희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남의 이익을 구하는 방법, 나는 죽고 남이 사는 방법을 논하죠. 그것이 보통 교회의 해석이고 방식입니다. 희생, 참 멋져 보이죠. 그런데 희생을 내가 주목적으로 삼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선교사 시절, 저는 종교의 자유가 제약받는 사회주의 국가에 있었습니다. 신분과 하는 일들이 다 비밀에 부쳐진 그런 사역들이었죠. 그런데 한국에서 소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단체로 방문한 이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시장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찬송을 부르고 성경책을 나눠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연히 현장에서 체포되었죠. 이들은 이미 그 모든 행동이 불법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당히 그 일을 한 거죠. 우연한 기회에 그들 가운데 한 사람과 만날 수 있었는데요. 그들의 말에 저는 아연실색했습니다. 그들은 잡혀갈 줄 알았고, 또 잡혀가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마치 그런 것이 희생 인양, 순교 인양 행했던 것이죠. 그 일로 인해 어렵게 복음을 전하며 사역하던 수많은 선교사들이 체포되거나 추방당했고, 저 또한 일정 기간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야 했죠.

 

이는 희생도 순교도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죽을 줄 알면서 뛰어드는 것을 자살이라고 하죠. 그것은 목숨을 경히 여기는 행동입니다. 우리의 희생은 누군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행동이죠. 죽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 살기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죽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살리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는 것에 저는 이의가 있어요. 기독교인들은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영광을 노래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희생이죠.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내가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은 이익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남을 제쳐놓고 나만 이익을 바라는 이기심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의미로 다시 말하면, 나도 이익을 구하고, 너도 이익을 구하는, 우리 모두 같이 좋아지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이 사랑입니다. 덮어놓고 나는 못 살 테니 너는 잘 살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죽음과 같은 희생을 했다면, 그렇게 사랑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기쁘시겠어요? 그 사랑 덜 받아도 같이 살고 싶고, 같이 잘 되고 싶은 것이 사랑 아닐까요?

 

당당하게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라고요. 나 잘 되기를 바라라고요. 그리고 나와 더불어 너도, 이웃도, 세상도 함께 잘 되기를 꿈꾸고 바라고 소망하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요.

 

나만큼 당신도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함께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잘 되어야 당신에게 좋고, 당신이 잘 되어야 내가 좋은 세상임을 선포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우리 다 함께 복을 누리고, 평안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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