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묵상일기55 - 잠시 나쁜 기억들은 꺼두세요.

2020. 12. 22. 06:50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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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0:26~27  사울이 기브아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때에,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용감한 사람들이 사울을 따라갔다. 그러나 몇몇 불량배들은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하고 떠들면서 그를 업신여기고, 그에게 예물도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울은 못 들은 척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긴급 발표가 났습니다. 5인 이상 사적인 모임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는데요. 아마도 연말의 송년모임 등을 통해 더 확산될지도 모를 코로나를 대비하기 위한 조치로 보입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참 애매한 부분들이 많네요. 함께 사는 가족들의 5인 이상 외식은 허용되는 것에 반해 따로 사는 가족들의 모임은 불가능합니다. 이 또한 코로나 확산 차단을 위한 조치로 보여요. 여하튼 많은 불편이 예상됩니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가족들과의 만남, 사랑하는 친구들과의 만남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답답하고 힘들기 그지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지향점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든, 어떤 상황이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운신의 폭을 제한하는 일들은 있죠. 그때 우리가 불편을 묵상하면 불편은 더욱 가중됩니다. 짜증과 분노는 키울수록 커지죠. 그럴 때는 좋은 점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제한 조치로 코로나가 수그러들 것을 희망하고, 내 건강이 지켜지는 일임을 생각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불편도, 짜증도, 답답함도 해소할 수 있죠.

이제 왕의 대관식이 끝났습니다. 큰 잔치가 끝나고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가죠. 그렇게 사무엘서 첫 번째 책 10장이 끝나가는데 저자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실을 기록하죠. 그것은 왕으로 세워진 사울을 따르는 용감한 자가 있었다는 것과, 반대로 그를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뭐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본래 찬성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이도 있죠. 따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저항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인정하는 것은 아니죠. 이를 두고 누구는 괜찮은 사람, 누구는 나쁜 사람 취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쩌면 저마다 자신들의 처지가 있을 테고요. 정치적 견해들이 다를 테니까요. 뭐든지 지도자의 자리는 선택의 자리이기에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지도 모르죠. 그런 의미에서 찬성자도 반대자도 있기 마련입니다.

100%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획일적이고 일률적이 될 수 있으니까요. 앞만 보고 달려가면 주변을 볼 수가 없습니다. 때론 반대자를 통해서 자신의 길을 묻고, 때론 닥친 문제를 통해서 나의 길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똑같은 이들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서로 다른 목적과 뜻을 지녔지만 그것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모든 것이 100%를 꿈꾸지 않아요. 단지 조화를 꿈꾸고, 서로 다른 힘과 뜻이 협력하는 것을 뜻하죠. 이는 획일이 아니라 하모니고, 혼합이 아니라 시너지입니다. 찬성만이 옳은 것도 아니고, 반대가 모두 그른 것도 아니에요. 서로 다른 것이 상생하고 성장하게 하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오늘의 본문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울의 태도였어요. 그는 못 들은 척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못 들은 척한 이유가 신중함 때문인지, 혹은 두려워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어요. 아마도 사울이 들은 것은 이런 것일 거예요. '어찌 사울이 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다는 것이 불만인 사람들도 있었을 거예요. 베냐민 지파는 12지파 가운데 가장 작은 지파였으니까요. 그만큼 지분이나 영향력도 작았겠죠. 그런데 그런 세력이 집권을 했으니 배가 아플 수밖에요. 또 사울의 됨됨이를 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이미 '사울마저 예언을 하는가?'라는 구절에서 보았듯이 사울은 그다지 주위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도 사울은 못 들은 척합니다. 사울이 어떤 의미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울의 이후 행적을 아는 우리로는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죠. 다만 저는 이 부분에서 긍정적인 사울의 태도를 묵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입장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 좋은 것을 묵상하기로 결정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당시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어요. 그때 이미 연로하셨고, 병상에 계실 때인데요. 제게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사실 아버지와 많은 나이 차이 때문에, 그리고 일찍 병상에 누우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그리 진지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요. 그날은 아버지가 제가 힘주어 말씀하셨어요. 

"목회를 하다 보면 너를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단다. 찬성하는 사람보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지도 몰라. 그때마다 아빠는 낙심하고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많았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런 낙심의 순간을 돌이켜보면 따르고 찬성해주는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더라. 너는 매 순간, 좋은 것을 먼저 바라보렴. 안 주신 것보다 주신 것을 먼저 생각하고, 슬픈 것보다 기쁜 것을 먼저 생각해. 그리고 난 후 너의 결정을 하렴."

우리의 일이 어그러지는 이유는 우리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을, 감사보다 화나는 일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일지도요. 옳은 판단을 하려면 나쁜 일들, 부정적인 생각, 분노에 찬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감사하고 기쁜 일들, 은혜와 축복의 일들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생각대로 해도 돼요. 그러나 나쁜 기억으로 가득 차서 주신 은혜와 감사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면 그 결정은 언제나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결정들을 하게 되겠죠? 그렇다면 잠시 나쁜 기억들은 꺼두세요. 그리고 좋았던 일들, 감사의 제목들, 혹은 앞으로 좋아질 일, 바라는 소망들을 먼저 생각해 보세요. 그때 주어지는 마음으로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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