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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서묵상 102 - 기도는 하나님께 설득당하는 태도입니다. 예레미야 42:8-22

요하난과 그 일행이 이집트로 가려고 하는 까닭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염려했던 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집트에 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갈 길을 묻기에 알려주신 것이죠.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길을 물었고, 또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대답을 인정하지 않았고, 따르지도 않아요. 아니 왜 그러는 것일까요? 분명,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했는데 말이죠.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응답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신의 길을 정하고 기도하기 때문이죠. 그러면 그것이 어떤 기도가 될까요? 자신의 결정에 대한 인준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기를 희망하는 기도죠. 보통 우리들도 어떤 결정을 정해놓고 누군가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그가 반대의 의견을 내면 화를 내죠. 그럴 거면 왜 묻습니까? 그것은 상대방의 의견을 물은 것이 아니라 강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경우에 따라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정해 놨어요. 그리고 자신의 뜻을 굳힙니다. 그리고는 기도하죠. 누군가에게 물어요. 이미 다른 의견이란 씨알도 안 먹힐 만큼 확고합니다. 

최근에 어떤 외부 분이 제게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의견을 요청해 오셨어요. 상황 설명을 듣고 이런저런 의견을 드렸는데요. 이분이 아마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것을 저에게 막 설명하시더라고요. 저의 의견을 내면 낼수록 더 강하고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더니 급기야는 저를 막 설득시키는 겁니다. 저는 당사자도 아니고, 이 일에 결정권도 없는 사람인데 왜 저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득시킬까 싶더라고요. 그리고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제 의견이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에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 같았어요. 저는 더 이상 저의 생각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의 기도가 그렇지는 않습니까? 이미 모든 것을 정해놓고 주님께 묻지는 않으십니까? 마치 기도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인 줄 알고 말이죠. 그러나 기도라는 단어 안에는 순종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배라는 단어 안에는 복종이라는 뜻이 담겨있듯 말이죠. 기도는 하나님께 설득당하는 태도입니다. 나의 뜻을 주장하려는 것은 기도가 아니에요. 그러려면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하면 되죠. 누군가에게 의견을 구한다면 그 의견을 듣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 의견을 듣지 않을 것이면 왜 의견을 듣겠어요? 단지 그런 태도가 마치 자신은 마음이 열려있고, 할 일을 다 했다는 자위 때문이라면 그것이 외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는다는 말에는 듣는다는 말이 포함되듯이, 주님 앞에 선다는 말은 나를 내려놓는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러길 바랍니다. 나의 뜻을 주장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다만 나의 뜻을 굳히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묻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듣는 것까지가 묻는 것의 끝입니다. 듣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순종하는 것까지가 듣는 것의 마지막이죠. 그래서 순종이 제사의 꽃이고, 신앙의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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