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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서묵상 98 - 나를 세우신 목적은 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레미야 40:1-6

오늘 본문은 바빌로니아의 근위대장 느부사라단과 예레미야가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빌로니아 군대의 총책임자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왕이 느부갓네살이었는데 어찌 이름이 비슷합니다. 혹시 친족이지 않을까 싶은데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아무튼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중에 예레미야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만난 것이죠. 이 장면은 이미 39장에서 잠깐 언급되죠.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를 예우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빌로니아에서도 예레미야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예우를 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보다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이 말이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패망했는지, 왜 끌려가는지 알지 못하는데 반해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는 마치 교회 안의 사람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욱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형태를 보고 혀를 차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로 싸우고 다투고 험악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기득권을 위해 다투는 교회 지도자들을 보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왜 사랑이 없고, 왜 용서가 없고, 왜 긍휼이 없느냐고 말하죠. 최근 여러 시위 현장에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분들이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내는지는 평가하기 쉽지 않습니다. 정치적 성향과 가치 판단의 기준은 쉽게 평가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기도하고 하나님을 외치던 사람이 다른 시위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서슴지 않는 장면은 짐짓 이해되지 않습니다. 너무도 다른 두 개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죠. 문제는 그런 모습을 그들은 모르는데 밖의 사람들은 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이중적인지, 얼마나 모순적인지 모르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조차도 이 문제점을 압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과한 찬양이 예수님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눅19:4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주를 위한 사역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그분의 사역을 위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이들을 통해서라도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돌들을 통해서라도 이루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은 우리가 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먼저입니다. 바빌로니아를 통해 이루시는 것은 바빌로니아가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나에게 맡겨진 일은 내가 하자’ 내가 해야 할 기도는 내가 해야 합니다.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나를 통해 이루실 일들은 나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나를 세우신 목적은 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미루지 마세요. 남에게 떠넘기지 마세요. 기어코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지 마세요. 먼저 하세요. 선행적으로 일하세요. 한발 더 일찍 움직이세요. 그 자발적인 헌신이 주님의 도우심을 이끕니다.오늘 본문은 바빌로니아의 근위대장 느부사라단과 예레미야가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빌로니아 군대의 총책임자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왕이 느부갓네살이었는데 어찌 이름이 비슷합니다. 혹시 친족이지 않을까 싶은데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아무튼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중에 예레미야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만난 것이죠. 이 장면은 이미 39장에서 잠깐 언급되죠.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를 예우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빌로니아에서도 예레미야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예우를 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보다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이 말이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패망했는지, 왜 끌려가는지 알지 못하는 데 반해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는 마치 교회 안의 사람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욱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형태를 보고 혀를 차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로 싸우고 다투고 험악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기득권을 위해 다투는 교회 지도자들을 보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왜 사랑이 없고, 왜 용서가 없고, 왜 긍휼이 없느냐고 말하죠. 최근 여러 시위 현장에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분들이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내는지는 평가하기 쉽지 않습니다. 정치적 성향과 가치 판단의 기준은 쉽게 평가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기도하고 하나님을 외치던 사람이 다른 시위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서슴지 않는 장면은 짐짓 이해되지 않습니다. 너무도 다른 두 개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죠. 문제는 그런 모습을 그들은 모르는데 밖의 사람들은 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이중적인지, 얼마나 모순적인지 모르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조차도 이 문제점을 압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와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과한 찬양이 예수님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눅19:4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주를 위한 사역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그분의 사역을 위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이들을 통해서라도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돌들을 통해서라도 이루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은 우리가 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먼저입니다. 바빌로니아를 통해 이루시는 것은 바빌로니아가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나에게 맡겨진 일은 내가 하자’ 내가 해야 할 기도는 내가 해야 합니다.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나를 통해 이루실 일들은 나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나를 세우신 목적은 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미루지 마세요. 남에게 떠넘기지 마세요. 기어코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지 마세요. 먼저 하세요. 선행적으로 일하세요. 한 발 더 일찍 움직이세요. 그 자발적인 헌신이 주님의 도우심을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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