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3. 15:36ㆍ묵상하는말씀/민수기묵상
민수기 13:1-20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사람들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여라. 각 조상의 지파 가운데서 지도자를 한 사람씩 보내어라." 모세는 주님의 분부대로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이스라엘 자손의 우두머리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르우벤 지파에서는 삭굴의 아들 삼무아요, 시므온 지파에서는 호리의 아들 사밧이요,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잇사갈 지파에서는 요셉의 아들 이갈이요,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눈의 아들 호세아요, 베냐민 지파에서는 라부의 아들 발디요, 스불론 지파에서는 소디의 아들 갓디엘이요, 요셉 지파 곧 므낫세 지파에서는 수시의 아들 갓디요, 단 지파에서는 그말리의 아들 암미엘이요, 아셀 지파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둘이요, 납달리 지파에서는 웝시의 아들 나비요, 갓 지파에서는 마기의 아들 그우엘이다. 모세가 땅을 탐지하라고 보낸 사람들의 이름이 이와 같다. 모세는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고 불렀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라고 그들을 보내면서, 이렇게 일렀다. "너희는 저기 네겝 지방에도 올라가 보고, 산간지방에도 올라가 보아라. 그 땅이 어떠한지 탐지하여라. 그 땅에 사는 백성이 강한지 약한지, 적은지 많은지를 살펴보아라. 그리고 그들이 사는 그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들이 사는 마을들은 장막촌인지 요새화된 성읍인지, 토지는 어떠한지, 기름진지 메마른지, 거기에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아라. 담대하게 행동하여라. 그리고 그 땅의 과일을 가져오너라." 때는 바야흐로 포도가 처음 익을 무렵이었다.
태조 이성계와 그의 친구 무학대사의 이야기를 다 아시죠? 정권을 잡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 때 좀 외로웠던 모양입니다. 권력이 손에 있으니 주위에는 쓴소리 하는 자보다 아첨하는 자들만 북적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 친구처럼 지내며 늘 바른 소리를 하던 무학대사를 찾아갔답니다. 그리고 그에게 테스트를 했는데요. 무학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오늘따라 당신이 마치 돼지처럼 보이는구려”
모욕에 가까운 말을 했지만 무학대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답니다. 반응이 없자 이성계는 다시 말을 겁니다.
“나는 당신이 돼지처럼 보이는데 당신은 내가 어떻게 보이오?”
이 말에 무학대사는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네, 전하! 전하는 부처님처럼 보이십니다.”
이 말에 이성계는 기쁘기보다는 슬펐습니다. 오랜 친구인 무학대사마저 자신을 친구가 아닌 권력자로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대하며 바른말을 해 줄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이성계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빼어 들고 무학대사에게 소리쳤습니다.
“어찌 아무리 권력자 앞이라도 진리를 다루는 자가 거짓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그때, 칼 앞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던 무학대사는 이렇게 말했다죠.
“저는 거짓을 고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돈안지유돈 불안지유불일뿐입니다.”
돈안지유돈 불안지유불(豚眼只有豚 佛眼只有佛)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뜻이죠. 오늘 본문은 12 정탐꾼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죠.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마치 정탐꾼 12명을 세우게 된 동기가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나옵니다. 그러나 다른 평행 본문들을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신명기 1장에 보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정탐을 하자고 한 제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미지에 세계에 대한 불안함의 발로였던 셈이죠.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기보다 하나님의 허락이 맞습니다. 의심과 두려움에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이들의 요구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죠.
때로 기도는 간절히 부르짖고 끝까지 매달려야 한다고 배웁니다.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요구하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우리의 요구와 매달림은 하나님의 허락을 이끌어 냅니다. 마치 끊임없는 요구와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로 울며불며 난동(?)을 부리는 어린아이에게 마지못해 허락을 하는 부모의 모습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요구를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허락이 있었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미 그들은 가나안을 두려워했고요. 그들이 하고자 하는 정탐은 길을 잘 가기 위함도 아니고, 수월하게 빨리 가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들은 가나안이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힘든지를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두려움과 걱정이 이끈 아이디어가 정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들의 답은 정탐하기 전부터 나와 있었습니다. 이미 그들의 길은 정탐하겠다는 생각에서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죠. 나의 뜻이 관철되는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 기도를 시작할 때부터 누가 그 길의 주인인지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은 단지 내가 정하고, 내가 걷는 길을 도울 하인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그 기도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죠.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각이나 마음은 없어요. 단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생각만이 가득 차 있죠. 이스라엘은 정탐을 떠나기 전, 이미 자신들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죠. 거기서 이미 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이제 걱정되는 일들만 보일테니까요. 그들의 눈에는 이제 부정적인 것들만 뜨일 것입니다.
무엇을 보느냐가 우리의 믿음을 좌우합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꿈꾸느냐가 우리의 길을 결정해요. 두려움과 걱정이 우리의 영을 채우면, 두려움과 걱정거리만이 눈에 보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우리의 생각을 채우면, 불평할 일들이 더 잘 보이고, 불만 가득한 일들이 주위에 펼쳐집니다. 두고 보자 하면 두고 보자 할 일들이 생깁니다. 그 일이 정말 많아서가 아니에요. 단 0.1%밖에 되지 않아도, 열중 하나여도, 그것만 보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만 보입니다. 제 아무리 99.9%가 은혜고 감격할 일이어도 0.1%의 불만이 모든 것이 되죠. 똑같은 돈인데, 어떤 이에게는 내 주머니에 넣어도 모자라고, 어떤 이에게는 나눠줘도 풍성합니다.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품느냐에 따라 달라지죠. 은혜를 감사하는 영혼의 눈에는 은혜가 보입니다. 사랑을 품은 영혼의 눈에는 모든 이들이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매일매일의 삶이 우리 믿음을 성장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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