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 12:24ㆍ묵상하는말씀/민수기묵상
민수기 12:9-16 사람에 대한 판단은 늘 신중하세요.
모세를 비난하며 지도력 교체를 도모했던
아론과 미리암의 행동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 진노는 예상외로 강했습니다.
이 일로 미리암은 악성 피부병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악성 피부병은 살이 눈처럼 하얗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한센병, 즉 문둥병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당시 한센병은 끔찍한 병이었습니다.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증세뿐만 아니라
병 자체가 저주의 굴레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극심한 전염성으로 격리조치가 불가피했죠.
한마디로 모든 사회로부터 버려져야 하는 병입니다.
어제도 묵상했던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아론과 미리암의 행동에 비해
하나님의 진노가 조금 과한 것 같은 생각은 저만의 생각인가요?
저는 여전히 아론과 미리암에 대한 동정이 가시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해석처럼 동생 모세의 지도력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었다고 해 보죠.
그렇다고 이런 병에 걸리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게다가 아론과 미리암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지도력에 대해)을 대적했다고 하기에도 조금 지나친 해석처럼 보입니다.
지도자는 비난 받으면 안 되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본문이 마치 지도력이나 지도자에 대한 비판,
특별히 목회자에 대한 비판을 하면 안 된다는 식의 해석에 대해
저는 동의가 잘 되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못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이
과연 모세를 비난하는 아론과 미리암을 응징하는 본문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오늘 일반적 해석과는 조금 다른 묵상이 되었습니다.
아! 그 말씀을 드리기 전에
왜 아론은 벌을 안 받았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 같은데요.
아론도 한센병에 고통받은 미리암만큼이나 큰 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유대 공동체에서는 한센병에 걸리면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되고,
버려져야 했다고 말씀드렸죠?
한마디로 고려장을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요.
그 결정을 누가했는가 하면 바로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이, 한센병이라는 사실을 확증해야 격리가 되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제사장이 누구냐면 바로 '아론'입니다.
그러니까 아론이 자신의 누이인 미리암을 격리시키도록 결정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은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결정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까요?
아론도 그런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론과 미디암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단순히 벌이었을까요?
저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왜 하필이면 한센병이냐 하는 것입니다.
병이 아프거나 육신적인 고통을 느끼도록 하려는 벌일까요?
물론 한센병은 살이 문드러지고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사실 한센인들은 그런 아픔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살이 떨어져나가도, 썩어 문드러져도 고통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다만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보는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지 못한다는 아픔이 있을 뿐이죠.
어쩌면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그걸 보여주고 싶으셨는지도 몰라요.
구스사람이라고, 이방사람이라고,
내가 버려야 할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차별하고,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죽어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요.
모든 생명, 모든 이웃은 다같은 하나님의 생명이라고요.
이것은 아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아론은 누이인 미리암의 한센병 확정을 내리기에 주저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결정은 자신이 이제껏 내렸던 어떤 결정보다
어려웠을 거예요.
어쩌면 하나님은 아론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사람에 관해, 생명에 관해,
제사장으로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요.
생명에 관해서는 신중의 신중을 더 해야 하고,
이웃에 대해서는
고통이 따르는 아픔의 마음을 가지고 생각해야 한다고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론과 미리암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였는지도 모릅니다.
이 메시지는 저에게도 속한 것입니다.
아론이나 미리암과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이 제 안에 있거든요.
어떤 판단이나 어떤 행동에 대해,
특별히 지도자의 그것에 대해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모세는 특히 사람에 관해서 너무 관대했어요.
그래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하면 이 사람이 걸리고,
저 일을 하면 저 사람이 걸려서 결정이 더뎠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는 지도자였죠.
나 같으면 단칼에 베고,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 가며 과감히 나갔을 텐데요.
그것이 딱 아론과 미리암의 생각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광야의 40년은
그런 신중함과 기다림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우리 인간을 단 한 사람도 놓치지 않으시려고
아직까지 기다리시며 참으시는 하나님처럼 말입니다.
사람에 대한 판단은 늘 신중하세요.
쉽게 정죄하지 마세요.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버리지 마세요.
아무리 감정이 상해도
여러분의 마음에서 격리시키는 것은 신중하세요.
내가 누군가를 마음에서 격리시키면,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됩니다.
생명에 관한, 인간과 이웃에 관한 일은
내 가족을 대하는 것처럼 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도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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