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죄인이어도, 비록 실수해도, 비록 넘어져도 내가 사명을 붙들고 살기에 주님은 여전히 나의 편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2018. 10. 2. 12:24묵상하는말씀/민수기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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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2:1-8 비록 죄인이어도, 비록 실수해도, 비록 넘어져도 내가 사명을 붙들고 살기에 주님은 여전히 나의 편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매일 말씀을 묵상할 때 지키는 최우선의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신 말씀이
‘오늘’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매일묵상은 성경공부가 아니라고 이미 말씀드렸죠?
저에게 매일묵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제게 주시는
가이드 같은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갓 들어갔을 때,
아침 등교 때마다 어머니는 저를 붙들고
매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길을 건널 때는 차를 조심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마치 그 말씀이 저에게는 그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밑그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말씀묵상을 할 때마다 저는 이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두고, 이렇게 따져보지는 않죠.
‘그 차는 어떤 차인가?’
‘어떤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지?’
‘사이좋게 지낸다는 말은 무엇일까?’
단지, 차가 없어도 길을 건널 때면 그 말씀이 기억나서
좌우를 살피게 되고,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말씀 때문에 선생님을 존중하게 되었죠.
친구와 다툼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던지 간에
어머니의 말씀으로 화해와 회복을 생각하게 되었음은 물론이죠.

그래서 말씀묵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상태와 마음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죠.
그래서 그 마음, 그 생각을 수정하거나
혹은 더욱 굳건히 품게 되기도 하고요.
현재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고민과 갈등들의
길잡이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말씀의 전이해가 필요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말씀은 알면 알수록 우리의 묵상이 풍성해지니까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인 묵상을 할 때보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묵상 글을 쓸 때는
본문에 대한 정보들을 많이 쓰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 성경의 정보들을 제공하기 위해서죠.

아무튼 그래서 매일묵상은
같은 본문이어도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새롭게 묵상되어집니다.
때론 저의 매일묵상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묵상의 제목과 달리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와 친형제 남매 사이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죠.
게다가 모세보다 손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드는 모습으로 비칩니다.
어떤 제목에는 이런 반기가
모세를 시기한 아론과 미리암의 모습이라고 적기도 하죠.
이스라엘의 지도자 자리를 놓고
암투를 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모세의 편을 들어주시는 것을 보면
지당히 아론과 미리암의 절대적인 잘못으로 끝나는
본문처럼 보이죠.
따라서 이 말씀은 지도력에 대한 도전을 경고하는 말씀으로
많이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저는 아론과 미리암을 조금 두둔해 주고 싶어요.
그들이 정말 시기심에, 지도자 자리가 탐나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성경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동기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사실 때문이라고요.
구스는 지명의 이름인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인 것 같습니다.
아론이나 미리암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히 이방여인입니다.
이방여인과의 혼인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임은 분명하고요.
어쩌면 아론과 미리암의 문제제기는
유대인으로서는 상식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모세를 두둔하셨을까요?
그리고 아론과 미리암에게는 왜 그리 혹독하셨을까요?

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묵상이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죠.
우리가 착하게, 선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생을 잘 산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그것을 글자로 적어본다면,
거짓말 안하고, 성실하게, 평화롭게,
베풀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것,
죄를 짓지않고 살아가는 것을 뜻할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윤리도덕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사회적으로 욕을 먹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함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가 죄에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인가요?
정말 윤리도덕적으로 살 수 있습니까?
혹시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요.
윤리와 도덕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그 윤리도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애써서 죄로부터 멀어질 수 있나요?

저는 오늘 우리의 선함이 다른 데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새롭게 묵상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명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어쩌면 우리에게 죄보다, 윤리도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에게 부여받은 사명말입니다.

모세에게 그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붙들고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힘을 부여하시죠.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명말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전하는 사명을 붙잡고 있어서 그 은혜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죄를 떨치고, 좋은 일 하며 살아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이 땅,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명자여서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하게 사는 삶이죠.

비록 죄인이어도,
비록 실수해도,
비록 넘어져도,
내가 사명을 붙들고 살기에 주님은 여전히
나의 편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깨끗해서, 내가 잘해서가 아니고요.
내가 훌륭하게 살고, 내가 대단한 일을 해서가 아니고요.
나에게 사명이 있어서요.
내가 그분의 사명을 붙들고 있어서요.
그래서 주님이 나를 두둔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멀리하기 애쓰기보다 사명을 붙드세요.
아니 사명을 붙들면,
사명을 살아내면,
자연히 죄가 벌어집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그 마음으로 살아가면,
자연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이 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사명 삼아 살아보세요.
나의 하루가 어떻게 변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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