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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3]길 THE WAY

4. 권리를 포기하는 길

마태복음21:28~32,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런데 맏아들은 대답하기를 ‘싫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서는, 가지 않았다.
31 그런데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맏아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 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행적을 쫓고 있습니다.
그 행적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의 약 며칠간의 행적입니다.
이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부터 그의 시간은 확정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마지막 며칠의 삶을 걷고 계신 것이죠.
우리는 이 마지막의 행적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마지막 행적에서 주시는 메시지를 읽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난주간 묵상에 저의 바람이 있다면 그 행적을 확인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의 드러난 행동과 말씀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 속에 숨겨진 숨결과 행간을 읽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을 대부분 알죠.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만 찾아보면 모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주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되기 바랍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행동과 선포의 근간이 되었던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는 것입니다.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같은 십자가에, 같은 모욕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분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하죠.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품고 가신 길을 되짚어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주일 예배 설교까지 고난주간설교시리즈 8번을 묵상할 것입니다.
그중에 이미 3번을 함께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알고도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리마인드는 설교시리즈 내내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알고 가신 예루살렘의 입성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죽는 것을 다 알고 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느끼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 고민이 바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민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에 처음 묵상한 것은 죽음을 눈앞에 둔 자의 인생설계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행적에서 보여주신 두 번째 길은 [이웃과 함께하는 길]이었습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 나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성전을 보았습니다.
그곳이 곧 내 마음이고, 신앙인이라고 자부했던 내 속사람입니다.
주님의 그곳을 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욕심을 비우니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보였습니다.
십자가사건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리와 권한을 비우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이웃인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건이죠.
그분의 순종, 그분의 비움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결정되었습니다.
나의 욕심을 비우고, 주님의 사명으로 채우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 기도로 이웃이 보이는 것이죠.
우리가 고난주간에 두 번째로 묵상한 것은 예배는 나를 비우고 이웃을 보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죠.

어제 우리는 세 번째로 [권력에 대항하는 길]을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권력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예전에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한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오지의 선교사로 사역하던 선교사님이 그만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귀국한 후 병상에서 곧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판정을 받고 누워있었습니다.
너무나 허망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주님께 하소연할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은 ‘내가 너를 치료하겠다’는 음성이었데요.
선교사님은 뛸 듯이 기뻤답니다.
선교사님은 새로운 기회를 주시면 주님 앞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가 될 것 같던 하나님과 선교사님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그런 기도의 응답을 들은 이후 밤새 하나님과 씨름했답니다.
왜 하나님과 또 다른 씨름이 있었는고 하니,
선교사님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데요.
“하나님, 눈을 뜨게 하시면 나가서 주님의 사역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교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래요.
“나가라… 네가 일어나 나가면 내가 눈을 뜨게 하겠다.”

신앙에서 우선순위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늘 일어납니다.
“하나님, 합격만 시켜주시면 열심히 주님의 사역을 하겠습니다.”
“하나님, 재물과 능력을 주신다면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불 보듯 뻔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너무 비루한 이야기죠.
하나님의 원리는 다른 우선순위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겠습니다. 이후 필요한 것들은 주님이 책임져 주세요.”

권력, 즉 돈과 명예, 능력이나 재능은 내가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오직 주님의 나라와 뜻뿐입니다.
그 사명을 다할 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님은 충분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우선순위입니다.
우리가 이 고난주간에 세 번째로 묵상한 것은 우리가 목숨 걸어야 하는 것은 내게 맡겨진 사명이고,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권력은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은 네 번째 묵상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오늘은 권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주 간단한 이야기일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다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부탁에 한 아들은 입으로는 거절했지만 그러나 행동으로는 순종했고,
다른 아들은 입으로는 순종했으나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 잘 아시는 내용이죠.
그러나 일단 우리는 몇 가지만 먼저 체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 그러니까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의 본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권한에 대한 시비를 거는 유대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죠.
따라서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은 그들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사회에서 지탄과 멸시를 받는 이들을 등장시킵니다.
본문에는 세리와 창녀들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요.
이들을 부르는 히브리말이 있습니다.
바로 [암 하레츠]라는 말입니다.
[암 하레츠]란 땅의 사람들이라는 뜻인데요.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상것들”이라는 표현으로, 가장 밑바닥의 인생을 뜻하는 말이죠.
예수님은 이들을 큰 아들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버려지고, 상했고, 어느 곳 하나 자랑할 만하지 못하지만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함으로 그들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들의 천한 신세를 손가락질 하지만 그들의 회개는 하늘의 문을 엽니다.
반면에 유대 종교인들은, 대답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멋진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는다는 경고죠.
이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치욕적인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기독교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최근 대통령에 의한 개헌안이 발의되었습니다.
저는 그 개헌안의 내용을 다 알지 못합니다.
또한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도 분간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제게 눈에 띄는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토지공개념인데요.
이미 여러 차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린 바 있지요.
토지공개념이라는 것이 만사형통의 경제개념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토지공개념에 대한 인식을 갖는 이유는 그 근간이 성경적 토지개념이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은 몰라도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생명은 모두 토지를 갖는 특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토지는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사유재산제도가 있는 사회에서 무조건 토지를 국유화 할 수는 없습니다.
토지공개념이 토지의 국유화도 아닙니다.
다만 토지의 공공성과 더불어 함께 누리는 제도의 구현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토지공개념의 이야기가 나오자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반대의견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토지공개념이 공산주의개념이라고 가르치는 이도 있습니다.
저는 이 제도가 좌우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토지공개념에 대한 최초의 제안은 박정희대통령이었습니다.
비록 부분적이었지만 그린벨트 지정 등 토지의 공공성을 창안한 측면이 있어요.
이후 토지공개념이라는 워딩을 그대로 드러낸 정권은 노태우정권이었고요.
전부다 보수적인 정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같이 좌절되었던 것은 토지로 돈을 벌었던 재벌들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대형교회를 조금 비판하겠습니다.
대형교회의 잘못은 큰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으면 큰 건물이 필요하죠.
기업화도, 조직화도, 또한 시스템도 잘못은 없습니다.
대형교회의 잘못은 세습도 아닙니다.
아들이라고 특권을 받을 필요도 없지만 차별을 받을 필요도 없죠.
아들이라고 다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교회의 잘못, 특별히 대형교회의 잘못이라면 그것은 성경적인 사회제도의 구현에 인색했다는 것입니다.
치솟는 땅값과 집값에 대해 함구한 것도 잘못입니다.
강남권의 교회들, 분당권의 교회들 잘못이 있습니다.
양극화되어가는 빈부의 격차에 대해 성경적 가르침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더 나아가 오히려 부자들의 편에 서서 정책을 꾸미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저는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당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떠올립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오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뭔지를 나누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첫째 아들입니까? 아니면 둘째 아들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첫째 아들이 되고 싶으세요? 아니면 둘째 아들이 되고 싶으세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대답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답을 하고도 하지 않잖니 가식적인 종교인을 바라는 것 같아서 선택하기 쉽지 않으시죠.
그렇다면 대답은 안 하고, 행동하는 아들이 되고 싶으세요?
그 첫째 아들의 일언지하 거절로 인해 아버지는 이미 상처를 받았을 겁니다.

예전에는 목사님 중에 깡패였다가 목사님 되신 분들 계셨는데요.
그분들이 부흥회에서 설교를 하면 매우 드라마틱했어요.
그래서 어릴 적에 저도 저런 간증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요.
그러면 여러분은 일단 깡패부터 시작하실래요?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옛날에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라는 말이죠.
그러나 어떤 목적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 이후에는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서울을 못가더라도 올바로 가야한다.”
올바른 과정과 행동을 강조한 말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 말 가운데는 올바로 가면 서울은 못 간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죠?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온전한 과정을 밟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낙담되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못 가는 구나…
예수님처럼 살면 행복을 누릴 수 없구나….
그러나 우리는 제3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올바로 가야 진정한 서울로 갈 수 있다.”입니다.
모로 가서 얻는 서울은 진정한 서울이 아니에요.
목적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은 돈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어요.
사리사욕과 이기심의 신앙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행복은 못 얻어요.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처럼 살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그런데 아들이 대답을 합니다.
예스, 혹은 노의 대답을 해요.
저는 이것이 신기했습니다.
아들들에게는 아버지의 말에 “예스”나 “노”로 대답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단 말이죠.
그것은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요청하는 권리가 있었다면 아들에게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이죠.
물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우리에게 대답할 권리를 부여하십니다.
그분은 실수가 없으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시죠.
우리는 그분께 대답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싫고 좋고 할 권리 말이죠.
그래서 그 권리를 남용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백번을 약속하고도 한 번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권리를 존중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편에서이고요.
우리는 그 권리를 누릴 만 한가요?
누려도 되나요?
주님이 나보다 날 더 잘 아시고, 주님이 우리의 주권자시며, 주님이 더 잘 인도하시는데요.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가 그 권리를 쓸 필요가 있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깊이 알아요.
그래서 그가 하는 모든 일들, 모든 행동과 말, 모든 행사를 신뢰하고 또한 믿죠.
그보다 더 나를 잘 알고 나를 잘 인도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예스 노의 권리를 행사할 필요가 있습니까?
비록 물어본다고 할지라도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는다면 선택할 권리를 포기하세요.
그분이 하시면 인정하세요.
그분이 밭에 가라시면 그것이 나에게 제일 좋은 일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쉬라시면 그것이 제일 필요한 일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골고다를 걸으라하시면 그것이 나의 사명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첫째아들과 둘째아들, 그들과 다른 길을 걸으세요.
권리를 포기할 줄 아는 길,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기도를 시작해 보세요.
제게 믿음 주세요.
주님의 말씀에 가부를 결정할 권리를 포기하게 해 주세요.
주님의 하시는 일이 내게 가장 좋은 일임을 인정하게 해 주세요.
그때 우리에게도 부활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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