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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3]길 THE WAY

2. 이웃과 함께하는 길


마태복음21:12~14,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3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14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1. 잃어버린 성전

오늘이 교회력으로 고난주일이라고 말씀드렸죠?
교회력에서는 고난주일을 또 다른 말로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도 부릅니다.
시간 계산상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기 때문이죠.
종려나무를 깔고 흔들었던 것을 빗대어 종려주일이라고 칭한 것이죠.
사실, 지난주 설교를 시간상으로는 오늘 해야 했지만 우리가 고난주간에 나눠야할 말씀이 많아서 한주를 당겨서 설교한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성전을 정화하셨던 예수님에 대해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제일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성전 때문인데요.
어쩌면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첫 행선지가 성전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전이 아수라장이었어요.
성경은 장사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교회에 장사하는 사람들로 북적인 것과 같은 것이죠.
이곳에 예배하는 사람들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면 어떻겠어요?
당연히 여러분이었어도 인상이 찌푸려지셨겠죠.

이런 장면을 연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 지났지만 2월이 되면 졸업식들을 많이 하죠.
졸업식이 거행되는 학교에 가면 입구에서부터 꽃을 파는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어떤 때는 그들로 인해 사람들의 보행이 불편할 만큼 많죠.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장사를 하지도 않습니다.
이리저리 사람을 붙잡고 호객행위를 하죠.
그러면 더 소란하고 정신이 없죠.
지금은 거의 그러지 않는 것 같은데요.
예전에는 졸업식이 열리는 학교 안에까지 이런 분들이 많았습니다.
사진을 찍는 분들이 깃발 같은 것 꽂고 다녔죠.
어떻게 보면 이게 졸업식인지, 난장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수선합니다.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문제는 그런 분위기를 만든 곳이 성전이라는데 있습니다.
어느 곳보다 거룩해야 하고, 경건해야 할 장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난감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장사하는 사람들이 성전에 많았을까 하는 점이죠.
왜 성전에 장사꾼들이 몰려들었을까요?
이를 설명하자면 좀 복잡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제사, 즉 예배를 하기 위해 성전에 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유일한 성전이었던 예루살렘으로 먼 곳에서부터 온 것이죠.
그러니 당연히 성전에서는 의식과 의례를 주관하면서 일정한 비용을 받았죠.
그것이 커져서 성전은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몸을 씻는 정결의 의식을 치러야 했는데요.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수 천 개의 수조시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몰려오는 그 많은 사람들을 씻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설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그 사용료는 절대로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과정에서 돈이 필요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자신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흠 없는 제물이 필요했죠.
그런데 멀리서 오면서 소나 양을 끌고 오기가 힘든 사람들이 있었죠.
그들을 위해서 소나 양, 혹은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장사꾼들로 인해 이제는 멀리서부터 동물을 끌고 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게다가 성전의 관리자들은 제물을 파는 사람들과 계약을 맺어 그들의 제물이 아니면 흠이 있다는 핑계로 접수를 하지 않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필히 그 장사꾼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성전에서 사용하는 화폐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화폐는 로마제국에서 통용되는 화폐였는데요.
다 당시의 로마황제 초상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상숭배라고 여겨 성전에서 사용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성전 내부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화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화폐로 환전을 해야 하겠죠?
이 과정에서 또한 엄청난 폭리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문헌에 의하면 무려 10배를 넘는 폭리로 화폐를 교환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께서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결코 과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위 성전정화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를 논합니다.
그의 분노는 단순히 장사꾼들 때문만은 아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돈 벌이의 수단으로 여기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죠.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를 허식과 가식의 행위로 바꿔버린 세태에 대한 분노인 것이죠.
단순히 시스템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는 교회에 ATM기기를 설치했어요.
오래전부터 신앙 생활해 오시던 분들은 헌금은 미리 준비하는 것이라고 배웠죠.
그런데 주일 아침에 띡! ATM기에서 인출하는 모습을 보며 거룩하지 못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시스템에는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변하고, 패턴이 변하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장사의 시스템 그 자체에 분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스템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종교성에 분노하시는 것이죠.

대형교회의 모습을 비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업 같다는 말씀을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사람들이 많으면 당연히 조직이 필요하고요.
행정적인 처리가 많아지면 시스템이 필요한 것은 당연합니다.
차가 많아지면 주차장을 만들어야 하듯이, 발전하는 환경에 따라 시스템이 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ATM기기 사용하는 것, 당연하고요.
화상중계로 예배를 드리는 것,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런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목적이 돈벌이가 되는데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버스를 운행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입니다만 거동이 불편하시거나, 차편이 없으신 분들을 위해 교회가 버스를 운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죠.
문제는 교인들을 잃을까봐, 교인 수가 줄고, 그것이 교회 재정에 문제가 될까봐 버스를 운행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암튼 예수님은 지금 저들 속에 존재하는 의식에 대해 지적하고 계심이 틀림없습니다.

2. 본질을 잃은 예배

그런데요.
여기서 저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또한 예배를 담당하는 제사장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과연 모르고 계셨을까? 하는 점이예요.
그분이 모르고 계시다가 예루살렘에 와보니 이런 난장판이어서 화를 내셨던 것일까요?
알기는 아셨는데 막상 눈으로 보니 도저히 못 봐 주겠다 싶으셨을까요?
아니면 모두 다 아셨는데 이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주시기 위해서 퍼포먼스를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그 모든 사실을 아셨다면 그리 심하게 분노하시지는 않으셨을 테지요.
그렇게 채찍으로 쓸어버리시면서 까지 분노하실 이유는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이에요.
마치 지금 당장 그곳이 치워져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것들을 내몰고 계시잖아요.
그런다고 그 시스템이 한 번에 바뀝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치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워야 하는 것처럼 서두시죠.
왜 그러셨을까요?
저만 이런 생각을 하나요?
아무튼 제게는 예수님이 퍼포먼스가 아니라면, 물론 퍼포먼스를 하실 분은 아니시잖아요.
예수님이 일부러 보여주려고 하신 것이 아니시라면,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유대 지도자들과 대척점에 서실 필요가 없으시잖아요.

마치 이런 것과 같아요.
이번에는 결혼식으로 비유를 해보죠.
결혼식에 오시는 많은 하객들은 정작 결혼예배에는 잘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눈도장 찍고, 부조금 내고, 식사하면 되는 줄 알죠.
그러려면 왜 결혼예식을 합니까?
그냥 모여서 밥 먹고 말죠.
저는 결혼식 주례를 할 때 꼭 문을 닫게 하는데요.
그리고 하객들도 결혼예배에 참여하도록 서약식에 함께 참여하게 하죠.
그 이유는 결혼예배에 온 분들은 축하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결혼에 증인되기 위해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분들인 것이죠.
그러려면 결혼예배에도 참석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증인도 서시고 해야죠.
그런데요.
제가 결혼예배에는 참여도 안하고, 뒤에서 떠들고, 밥만 먹고 하는 분들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결혼예배에 왔으면 그 예배의 의미를 알아야지…”
그렇게 큰소리치고, 결혼식장을 다 뒤집어 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회개를 하고, “그렇구나” 하겠어요?
그 다음날부터 결혼식장의 풍경이 달라지겠어요?
오히려 저만 쫓겨나고 이상한 사람 되지 않겠습니까?
그 일로 유대 지도자들의 역린을 건드려 구체적인 제거 실행에 들어간 것을 보면 예수님의 이런 무모한 시도 또한 원하시는 대로, 뜻하신바 대로 이루어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하셨을까?”
“거기에는 다른 메시지가 있지는 않을까?”

이런 미련한 질문을 가지고 말씀을 다시 봅니다.
수없이 읽었던 본문의 말씀인데요.
그리고 이 장면은 어렵지 않게 머리에 그려지는 유명한 일화이기도 한데요.
문득 이전에는 한 번도 눈길이 가지 않았던 문장에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그것은 14절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21:14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여기서 잠깐 역사공부를 할까요?
예수님 당시 성전의 이름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이 처음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아닙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죠.
이후 바벨론에서 포로로 있던 이들이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는데요.
그 성전이 제2차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이후 헤롯이 유대지배의 정권을 잡은 후, 자신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해 성전을 짓는데요.
그것이 제3차 성전인 예루살렘성전입니다.
그래서 헤롯의 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성전마저 AD70년, 유대와 로마의 전쟁으로 함락되어서 성전의 서쪽 외벽만 남고 다 파괴되었죠.
그 서쪽 외벽이 유명한 “통곡의 벽”입니다.

이 성전의 모양은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성막의 모형대로 지어졌습니다.
바깥 외벽으로 둘러싸인 내부에 지성소라 불리는 성전의 본채가 있죠.
외벽문을 통과해서 너른 마당을 지나 성전의 본채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장사꾼들이 장사를 한 장소는 바로 이 너른 마당인데요.
이 마당을 뭐라고 불렀는지 아십니까?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전 안에 이방인들을 위해 공간을 마련한 것이죠.
이를 생각하면 이방인들에 대한 포용과 사랑을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마당은 안뜰과 바깥뜰로 나뉘어 있었는데요.
안뜰은 유대인들을 위한 마당이었고, 바깥뜰은 이방인들을 위한 마당이었죠.
그리고 안뜰 입구에는 “이방인 출입금지”라는 푯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공간은 이방인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이방인을 차별하는 공간인 셈이죠.
성전에서조차 이방인을 차별하는 구조였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거두절미하고 이 곳에서 장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장사꾼들을 물리적으로 몰아내셨습니다.
순간 그 장소에 공간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대하게 되는 말씀이 바로 14절입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21:14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유진 피터슨목사가 번역한 메시지번역본에는 이 구절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눈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들어설 자리가 생겼다. 그들이 예수께 오니, 예수께서 그들을 고쳐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이 저는 마치 제 마음처럼 보입니다.
수많은 욕심과, 끝없는 욕망, 그리고 스스로를 배불리고자 하는 욕구들이 산재해 있는 곳 말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조차 나를 위해서, 나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나의 편함을 위해서 나아가는 내 안에 가득 찬 이기심이 곧 예수님께서 서셨던 그 자리, 예루살렘의 성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돈만 벌면 성공이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서 내 평안을 쫓는 길이 신앙이었습니다.
주님이 만드신 평화를 나를 위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고,
주님이 세우신 사랑을 자기애로 국한 시킨 신앙이 바로 도둑의 소굴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마음, 그 모습, 그 욕망을 거두어내니까 그 자리에 이웃이 보여요.

저는 예수님의 성전정화장면에서 또 다른 메시지를 대합니다.
내 욕심을 버려야 이웃이 보인다는 것이죠.
여기서 진정한 기도의 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곳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죠?
기도는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숱하게 자기 욕망을 위해서 살다가, 거룩한 친구 예수를 만나 사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자신의 것들을 버리고, 자신의 욕심을 던지고, 주님 앞에 서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내 이웃이 보여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실 때, 우리는 나의 것을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어려운 이웃이 보여요.
다시 말하면 기도는 이웃을 사랑하는 눈을 뜨게 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분노, 그리고 그분의 열정적으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맙시다.
진정한 예배는 여러분에게 이웃이 보여야 해요.
그것이 신앙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않는 길이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에요.
예배의 결실은 이웃이 보이는 것입니다.
신앙의 결실은 나의 목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보이는 거예요.
그 눈을 주님이 사랑하십니다.
그 마음을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그 뜻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십자가의 두 번째 길은 이웃이 보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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