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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3]길 THE WAY

7. 경제를 새롭게 보는 길


마태복음26:7~13
7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8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였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요?
9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요!”
10 예수께서 이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11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12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1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고난주간 지난 5일 동안, 함께 기도의 자리를 지켜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신 것만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이 시간 기도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각자에게 힘과 위로를 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각자 처소에서 기도하신 분들도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이후의 행적을 통해 우리게 주시는 메시지를 묵상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행적을 모두 쫓지는 못했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못 다한 주님의 행적들을 쫓아 조금 더 묵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지나간 길들을 제목을 읽으며 짧게 되짚겠습니다.

첫째, [알고도 가신 길]
저는 여러분들이 낮은 줄 알고도, 힘든 줄 알고도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이 애초부터 그렇습니다.
이것을 마치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라고 속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좁은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거예요.
아닙니까?
선언을 그렇게 했는데 혹시 더 좋은 게 있을까? 더 높은 게 있을까? 그런 마음인가요?
사실 그것이 거짓예언이고, 거짓설교 아닙니까?
이미 우리는 알고 가는 거예요.
이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길이 몰려올지도 모른다고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을 우리가 또 마주치고, 그 힘든 것 해 냅니다.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가슴으로 부딪치니 이겨냅니다.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여러분은 그렇게 살아오셨잖아요.
죽을 것 같은 마음,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이겨내잖아요.
그것이 주님의 도우심인 겁니다.

둘째, [이웃과 함께 하는 길]
성전은 주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하는 곳이죠.
물론 장소와 상관없이 어느 곳이든 주님과 예배하고, 기도하는 곳이 성전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선생의 이야기를 빌리면 우리의 마음이 곧 성전이죠.
고린도전서 3:16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 성전을 세상이 추구하는 바대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님은 보여주십니다.
돈벌이와 이기심, 그리고 사리사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을 말이죠.
우리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때론 우리의 욕망 때문이기도 하죠.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때론 반대급부를 위한 포석이기도 하고요.
이런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마음을 버리도록 촉구하셨습니다.
그렇게 욕망과 욕심을 버리니 그제서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보였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냥 선량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죠.
바로 그것이 예배이고, 성전의 주 목적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예배의 길이죠.

세째, [권력에 대항하는 길]
부와 명예, 평안함과 힘 등, 권력은 우리 모두의 지상 목표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편한 것을 누리며, 더 좋은 것을 취할 수 있을까가 목표죠.
문제는 그 권력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욕주의가 주님이 바라시는 것도 아니고, 산속 수도원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도 아니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땅, 이 사회에서 빛을 발하고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권력을 어떻게 얻느냐 하는 점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꿈꾸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추구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에요.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죠.
그러면 그 열심히 일한 것이 권력으로 옵니다.
월급도 받고, 직급도 올라가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내가 일하는 목적이 돈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여러분이 사장이어서 누군가에게 일을 시켰어요.
한 사람은 돈이 목적이어서 일을 열심히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일이 즐거워서 열심히 하죠.
여러분은 누구에게 마음이 가십니까?
하나님의 원리도 다르지 않아요.
하나님도 우리에게 세상의 제물과 명예를 주고 싶으시죠.
그런데 그 제물과 명예는 주님의 나라와 뜻을 향해 사역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권력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대항해야 합니다.
권력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우리의 목표입니다.
권력은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네째, [권리를 포기하는 길]
두 아들의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나옵니다.
집을 떠난 둘째가 회개하고 돌아오죠.
아마도 이전보다 그 아들은 확실히 달라졌을 것이 뻔합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큰 삶의 터닝포인트를 가져다 주죠.
반면 끝까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아들은 둘째에게 환대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죠.
그 불만 표출은 그동안 자신이 아버지 곁에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드러내고 맙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우리는 둘째 아들이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첫째나 둘째나 거기서 거기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우리는 첫째나 둘째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들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라고 말씀하시죠.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주님 앞에서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탕자인 둘째가 집을 떠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것 때문 아닙니까?
첫째는 왜 불만입니까?
그 또한 자신의 권리 때문이잖아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순종에 대한 첫째와 둘째의 태도 또한 그들의 권리 주장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안 갈 권리, 순종 안 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나의 권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가져가신다고 해도 주장할 권리가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때 드러난다는 것이죠.
우리가 권리를 내려놓으면 주님이 우리의 권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권리주장을 내려놓고 주님께 나오면 둘째를 환대하신 아버지처럼 주님은 우리를 세우시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입니다.

다섯째,  [정치를 넘어서는 길]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안드레를 비롯한 다수의 제자들이죠.
열심당원 출신도 있었습니다.
젤롯당이라고 불리우는 열심당이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그리고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인의 4대 학파 중 하나 일만큼 유명합니다.
다만 이들은 열정적인 종교적 열의로 때론 과격하게, 때론 용감하게 행동으로 보여 온 이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유는 각기 다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유대의 독립과 같은 정치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유대가 해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로마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런 정치적인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위협을 받고 있는 유대종교지도자들도 정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상황을 정치적으로 해석했어요.
심지어는 예배를 드리는 것조차 정치적이죠.
정치적인 사고는 우리의 인식에서 배제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합니다.
어떤 이가 말하길 신앙이 다른 것은 괜찮아도 정치적 성향이 다른 것은 용납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남북으로, 동서로 첨예하게 갈려있는 이 땅은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과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짓밟아야 사는 사회는 똑같습니다.
이때 세금논쟁을 통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그분은 정치적인 시선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성향의 이념으로 주님의 말씀을 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정치적인 성향을 넘어서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여섯째, [종교를 벗어나는 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마태복음22:37~39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하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법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제사법에만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에만 열을 올렸습니다.
정작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이름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사는 데는 소홀했습니다.
주님이 완성시키시고자 하는 율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사법에만 국한된 종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삶이 예배가 되고, 삶이 신앙이 되며, 삶이 곧 그리스도의 길이 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당부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경제에 관한 것입니다.
다 아시는 말씀이죠.
한 여인이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 말입니다.
이 사건에 관해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그 여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그 여인을 마르다의 자매인 마리아라고 지칭하고 있죠.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다른 점은 또 있습니다.
앞의 두 복음서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발에 붓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들을 한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2가지 관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첫 번째는요.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놀랐다거나, 혹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거나가 아니라 분개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향유를 쏟은 것도 아니고, 자신이 가져온 자신의 향유를 쏟았는데 제자들이 분개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왜 분개했을까요?
단순히 예의에 벗어난 행동이거나 혹은 여인에 대한 차별 때문은 아닌 듯 합니다.
성경에는 또렷하게 제자들의 마음에서 “아깝다”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죠.
요한복음에서는 가룟유다라고 지칭한 제자의 말이 그대로 적혀있습니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요?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요!”

그도 그럴 것이 이 향유를 돈으로 계산하면 놀랄 정도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는 그 값어치가 300데나리온이라고 적고 있어요.
1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일 때 이걸 일일이 계산해 봐야 하죠.
그래야 감이 확 오니까요.
일일 노동자의 품삯이 오늘날 얼마쯤 될까요?
시간당 최저임금이 올해 7,530원이죠.
하루 9시간을 일한다면 67,770원입니다.
이것을 300으로 곱하면, 20,331,000원입니다.
그러니까 2천만원을 한순간에 쏟아 버린 것이 되는 셈이죠.

그런데 정말 제자들은 그 돈으로 더 좋은 일을 하고 싶어서 분개했을까요?
그러기에는 사도요한이 요한복음에서 짓궂게도 성경에 가로까지 쳐가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2: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 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분개한 이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그 돈의 값어치에 목적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 돈이라면 이런 일도 할 수 있고, 저런 일도 할 수 있는데… 하는 목적 말이죠.
우리들도 경제적이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은 다른 말로 목적을 갖는 것을 말하죠.
규모 있게 목적을 정해서, 모으는 것은 모으는 목적, 쓰는 것은 쓰는 목적으로 사용하죠.
대부분 경제적인 측면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산을 합니다.
계산을 해 보니 이것이 아까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보는 경제적인 시각입니다.
돈은 계산을 해서 손해 보지 않을 방법으로 써야 가장 경제적인 것이 되죠.

그러나 여인의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이 주목할 두 번째 관점입니다.
그녀는 분명히 그 향유를 정말 알뜰하게 모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모으려면 목적이 있어야 했을 거예요.
그는 목적을 가지고 돈을 모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그의 마음에 주님을 위해 뭐든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겁니다.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 여인에게는 아무런 목적이 없었어요.
아마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이 이천만원의 값어치를 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에는 목적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목적이 본래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데 목적이 없으세요.
그분이 우리에게 뭔가를 얻으려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사랑하셨습니다.
그게 사랑인거거든요.

경제는 목적을 가져야 모으고 쓰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그 여인도 향유를 모았어요.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그 목적을 잊었어요.
사랑 앞에서 그 계산을 버렸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는 순간 ‘이것이 얼마짜리구나’ 생각이 드세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랑에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어떤 계산이 없거든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나무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태복음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이 말씀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장례를 위해 그 일을 한 것도 물론 아니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놀라운 것은 그저 사랑의 행동인데, 계산 없는 사랑은 뜻하지 않은 곳에 귀하게 사용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진심어린 사랑, 목적 없는 사랑은 결국 예상하지 못한 귀한 목적을 이룬다는 겁니다.
그것이 진실한 사랑의 신비에요.
나는 그저 사랑했을 뿐인데 주님은 그 사랑의 대가를 지불하시죠.
그리고 나머지 말씀도 하십니다.
마태복음26:1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제, 정말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야 하는 철저한 계산이죠.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여러분의 머리를 쓰지 마세요.
사랑을 돈으로 계산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사랑에는 어떤 목적을 두지 마세요.
이웃을 값어치로 계산하지 마세요.
그냥, 값없이, 겁 없이, 계산 없이 사랑하세요.
그 진실한 사랑만이 주님을 통해 재생산 되는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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