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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3]길 THE WAY

8. 미래를 사는 길


마태복음28:16~20,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17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8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부활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삶과 가정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지난 3월 셋째 주부터 시작한 고난주간설교시리즈 길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묵상해 왔습니다.
새벽에 오신 분들은 그 메시지를 무한 반복해서 들으셨죠.
제가 계속 복습하며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죠.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의 약 일주일간의 여정을 다 짚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일주일의 초반에 해당하는 분량을 함께 나눴습니다.
이제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대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이죠.
바로 대위임령이라고 부르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저는 천천히 다시 읽고 싶습니다.
본문을 따라가면서 주님의 메시지를 되새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가룟유다를 잃었으니 11제자일테지요.
그리고 그들은 갈릴리로 갔습니다.
이유는 이미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명령을 들은 것이죠.
예수님은 그 여인들에게 갈릴리로 제자들을 오도록 말씀하셨습니다.

17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드디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당혹스러운 문장을 접하게 되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이들은 제자들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누가 의심했느냐가 아닙니다.
왜 의심했느냐이죠.
만약 예수님을 보았다면 어땠을까요?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뵙고 의심을 했을 리는 만무하죠.
주님을 뵈었다는 것과 의심했다는 것 사이의 괴리가 분명히 존재하죠.
그렇다면 이 의심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에 대해 마태는 자세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은 부활이전의 바라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바라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부활이전에는 육체의 눈으로 보았다면, 부활이후에는 그 눈과 함께 다른 눈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 눈이 무엇인지는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자! 18절로 넘어갑니다.
의심하는 이들의 눈초리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 첫 말씀이 당신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권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구절에서 처음으로 그간 가졌던 관습과 싸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어떤 특별한 권력을 얻었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은 의미죠.
동네 꼬마들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형들이 놀이터에 와서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합니다.
방해만 한 것이 아니라 ‘삥’을 뜯습니다.
그때 꼬마 중의 한 아이가 형들에게 대들었습니다.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꼬마는 오지게 맞았습니다.
코에서 피가 나고, 얼굴이며, 다리며, 온 몸이 온통 멍들만큼 흠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종료되었는데요.
문제는 이 맞은 꼬마의 아버지가 나타난데 있어요.
그 꼬마의 아버지는 그 동네 파출소 소장이었습니다.
꼬마는 아빠를 등에 업고 이제 자신을 때린 동네 형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가 지적하는 형들은 이제 다 잡힙니다.
좀 전과는 다른 대단한 권세를 얻은 것이죠.

우리는 이 구절을 마치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하늘의 권세, 땅도 다스리는 권세를 이제 예수님이 얻으셨다라고 말이죠.
어쩌면 성경의 권세라는 해석이 조금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권세라는 것이 권력과도 같은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공생애기간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복했습니다.
그 말씀에서 권위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예수님 말씀의 권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가 사용한 수사적인 표현? 혹은 웅변술?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수사를 사용하지 않으셨고, 일반적인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말씀은 전대미문의 이야기이거나 뛰어난 화술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예수님의 비유법, 화술법 등을 연구하는데요.
그것을 보면 좀 웃음을 참을 길이 없습니다.
당대 말로만 하자면 뛰어난 화술의 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오늘날도 예수님보다 더 말씀 잘 전하는 목사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의 말씀을 들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죠.
기막힌 예화와 뛰어난 언변으로 설교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권위의 상징도, 권세의 근간도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진짜 권세는 다름이 아닙니다.
그가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이죠.
그가 말씀을 삶으로 이끌어 내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권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정말 말씀대로 가장 낮은 십자가를 지셨고, 또 말씀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가 말씀대로 친구를 위해, 우리를 위해 죽었고, 또 그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겁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말대로 사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제가 지난 고난주간 새벽에 말씀드렸죠?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제사법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시민법에는 소홀했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정말 엄청난 수사를 동원해서 말했지만 내 이웃에 대해서는 사랑이 아니라 지배와 억압, 그리고 소유로 일관했다고요.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사도요한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설교단에서 사랑을 말하지 않는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 교회가 진정 이웃을 향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을 때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권세는 바로, 믿음바대로 행동하고, 말한바 대로 삶으로 드러내는 것에 있습니다.

이제 핵심 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 구절에서 핵심적 구분을 하면 2가지입니다.
제자를 말씀드릴 때 제가 꼭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자는 똑같은 삶을 요구받지 않는다고요.
신학교 시절, 일찍 군대에 간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최전방 GOP에서 근무했는데요.
그가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 전공을 살려서 군종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친구들은 최전방이지만 군종병이라는 소리에 조금은 편안 보직이어서 안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왠걸요.
그가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우리는 그 친구를 보고 놀랐습니다.
군에 간지 갓 3개월을 넘겼는데 우리 앞에 나타난 그 친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까맣게 그을리고, 남자치고 고운 손이던 그의 손마디는 다 부풀어 올랐더라고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분명히 보직이 군종병은 맞은데, 그가 군종병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보직은 박격포병이었는데 어느 날 간부가 와서 군종업무를 볼 사람을 찾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보직을 다 하고 남는 시간에 군종업무를 하는 거라고 하면서 말이죠.
대뜸 그래도 신학생인데 할 사람이 없으면 내가 해야지 싶어 손을 들었데요.
자기 직무를 다 한 후, 모두 취침에 들면 그때부터 물 끓이고 과자봉지들고 나갔데요.
교회도 없어서, 주일이면 전방부대 3개를 몇 시간씩 걸어서 이동해 예배도 하고요.
친구들이 다 때려치우라고 아우성일 때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이게 제자의 삶이지 뭐~”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세례를 거행했는데요.
세례라는 것이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거든요.
주님과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세상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사는 것이라고 말했죠.
2가지를 포괄적으로 말하면, 전혀 다른 세계로의 초대입니다.
지금껏 내가 빠져 살았던 그 세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 말이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마지막구절입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 이 구절에서는 핵심입니다.
여기에는 두 동사가 있습니다.
가르치다는 동사와 지키다는 동사죠.
그런데 이 동사의 주체는 같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있고, 지키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어도 지키는 것은 배운 사람의 몫인 것이죠.
그런데 지키도록 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가르친 것을 지키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근한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식사 전에는 손을 씻는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그것을 지키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감시하고, 때리고 그래요?
그게 아니라면? 같이 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서 나왔다고요?
그가 말씀과 같은, 생각과 같은 행실에서 나왔다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19절의 제자 삼고, 세례를 주고, 20절의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제자의 삶을 살고, 내가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을 살고, 내가 매일 그 삶을 드러내며 살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한 가지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죠?
바로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말씀을 종합해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군림과 제압의 권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권세이죠.
높은 곳을 쫓아 누리는 권세가 아니라 낮은 곳에 임하여 십자가를 지는 권세입니다.
제자의 삶이나 세례의 의미는 또 무엇입니까?
동일한 대가나 보상을 염두해 두지 않는 삶과,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일반적인 시선으로 부활의 주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권세라는 시선으로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공격할 차례라는 자각으로는 부활의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낮아지는 것이 승리이고, 내가 죽어야 산다는 자각의 시선이 아니면 부활의 주님을 못 봐요.
이제 우리는 미래도 거듭난 시선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활이 여러분의 생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낮아지면 높아지고, 죽으면 살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라는 게 믿어지십니까?
여러분의 몸이 거듭나듯, 여러분의 생각도, 여러분의 경험도 거듭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상처도, 여러분의 감정과 감각도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 인격으로 미래를 사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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