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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3]길 THE WAY

5. 정치를 넘어서는 길

마태복음22:15~22,

15 그 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
16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17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18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다.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21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22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그동안 우리는 예루살렘 입성 이후의 예수님 행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행적을 우리가 사는 인생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묵상중이죠.
계속 반복합니다만 맨 먼저 죽음을 각오한 여정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도 그 중심으로 걸어가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쿼바디스]라고 하는 오래된 영화에는 인상 깊은 장면이 나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이 개선 행렬을 하는 장면인데요.
마차에 탄 개선장군을 향해 수많은 군중들이 환호를 하며 그 전쟁영웅을 칭송하죠.
그 장면은 장관입니다.
그런데 그 개선장군 뒤로 월계관을 손에 든 노예가 바짝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군중의 환호성이 외쳐질 때마다 이렇게 말하죠.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란 라틴말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입니다.
개선장군을 환영하는 개선식에서 노예에게 이런 말을 되뇌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너 또한 죽는 존재이니 승리의 순간에도 항상 겸손하라’는 황제의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이라는 한계 안에 두신 이유가 있을지 몰라요.
그것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낮아짐이기 때문이겠죠.
예루살렘의 입성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 또한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살았으면 합니다.
거기에 겸손이 있고, 거기에 낮아짐이 있으며, 거기에 욕심이 아닌 선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처음 찾으신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탐욕과 사리사욕을 보셨어요.
그는 손수 장사치들을 내모시면서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세상의 것을 취하는 자들을 향한 분노였습니다.
그 성전은 우리의 마음속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온통 나의 이야기, 나의 문제, 나의 걱정들이 쏟아지는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나의 억울함, 나의 궁핍함, 나의 어려움만이 모든 걱정의 전부인 것처럼 예배를 채우죠.
내가 가득하니까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죠.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다른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쉽게 설명드릴 수 있어요.
여러분은 설교시간을 매주 마주하시죠?
그런데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었지만 여러분 마음에 다른 것으로 가득 차 보세요.
회사일, 집안일, 다른 사람 일, 심지어 맛난 음식 생각으로 가득 차 보세요.
말씀이 들리지 않거든요.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큐티를 하는 것, 묵상을 하는 것은 잠잠히 주님이 말씀할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46:10,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요.
조용한 시간을 많이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성전에서 한 바탕 소동이 일어난 이후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마주 하셨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을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싫어한 이유는 예수께서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셨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기득권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었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웃들을 지배할까?였어요.
그들에게는 인생 최종 목표가 기득권, 권력, 재물 들이었죠.
이것은 현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적인 목표입니다.
인생을 사는 목적이, 돈을 버는 것, 편안을 추구하는 것, 권력을 얻는 것이죠.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은 권력, 돈, 편안함 다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원리에서는 우선순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어떻게 보이세요?
제일 꼭대기에 올라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예를 드셨을 때 그들이 대답을 못했다는 거예요.
왜 못했을까요?
유대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세례요한에 대해 잘못 말하면 반란이 일어날까봐 두려웠던 거죠.
그런 유대지도자들이 부러워보이세요?
다 얻은 것 같은데, 다 가진 것 같은데 그들이 왜 저는 불안해 보이고 초라해 보일까요?
권력을 얻고, 많은 것을 가졌는데 유대 지도자들이 왜 한낱 아무 권세도 없는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을까요?

권력을 쫓는 것, 부와 권세를 쫓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면 그렇게 됩니다.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게 되죠.
그래서 거기에는 행복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창조의 원리로 사는 우리의 삶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권력을 제1의 목표로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이사야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사야43:21 ,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우리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예요.
그 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의 영적 원리입니다.
우리도 오늘 예수님의 질문을 받습니다.
“너의 인생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냐? 세상에서 나온 것이냐?”

유대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싫다고 했지만 그래도 순종한 아들과, 하겠다고 말했으면서도 정작 행동하지 않은 아들이야기죠.
이를 예수님은 가장 천한 이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교하면 말씀하셨습니다.
그럴싸한 의식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람인척 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이죠.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우리에게는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없습니다.
또한 자녀들을 선택할 권리도 없죠.
생명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수많은 권리가 숨어 있지만 정작 큰 틀에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내 세울 권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혹은 권력 앞에서는 우리가 권리를 내 세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존중받아야 할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다 권력이나 민족, 정권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에게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권리를 내려놓으면, 주님이 나의 권리가 되어 주십니다.
잊지 마세요.
당신의 권리를 내려놓으면, 주님이 당신의 권리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가신 길, 다섯 번째입니다.
정치에 대한 묵상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헤롯당원들이 예수님께 와서 트집을 잡을 요량으로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것이죠.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식민지배를 당했지만 정부의 형태는 자치정부였습니다.
대신에 로마는 총독을 주둔시켜 세금으로 통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 세금 문제에 있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금을 내는 것 자체가 로마에 일조한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세금을 내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금을 냈습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내지 않으면 처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이스라엘에는 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지칭하면서 로마에 대항할 것을 백성들에게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 것이 세금 거부 운동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곧 진압이 되었고, 유다를 비롯한 이 운동에 동참했던 사람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처형이 십자가의 처형이었는데요.
당시 십자가를 만들 나무가 부족했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세금이 부당하고,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많았죠.
지금 헤롯당원들은 그런 묘한 분위기의 문제로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일제 당시 비슷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한 예로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와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을 일본화하고,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이름 있는 사람들이 똑같은 짓을 하면 친일파라고 욕을 했습니다.
자신은 억압과 협박에 어쩔 수 없이 했지만 마음으로는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지금 어떤 대답을 해도 곤경에 빠질 처지입니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현행범으로 붙잡힐 위기이고요.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대인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주권을 파기한 주범으로 몰릴 처지죠.
지금까지 예수님을 트집 잡으려는 수많은 시도 중에 가장 절묘한 시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답을 한번 보시죠.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예수님은 질문하는 이들에게 세금을 낼 때 쓰는 돈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보였습니다.
당시 통용되는 화폐는 데나리온이었는데요.
그 돈에는 앞면에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이름도 적혀 있었습니다.
반대 면에는 황제의 아내 얼굴이 새겨져 있었죠.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는 누가 그려져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황제라고 대답했죠.
이에 예수님은 21절의 말씀처럼 대답하셨습니다.

상상하기 힘든 절묘한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어느 쪽 하나도 부정하지 않는 대답이었습니다.
절묘한 대답임은 그들도 인정하고 돌아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이 말씀은 그저 그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적절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 더 새겨볼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은 지금 세금을 내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실 뜻이 전혀 없으십니다.
조금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세금을 내면 로마 편, 세금을 안내면 하나님 편,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동참하기 원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데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삶을 사는 주체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처럼 첨예한 이분법적인 사고와 좌우의 대립 속에 있으며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강요받는 사회에서는 이 말씀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정치라는 것이 본래는 서로 좋은 경쟁을 해서 최고의 선물을 선사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마치 운동선수들이 선의의 경쟁을 해서 최고 기록을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난 동계 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일본과 한국이 각각 금은메달을 땄습니다.
이 장면이 훈훈했던 것은 1,2등 선수들이 경기를 마치고 서로 포옹을 하며 격려하는 모습 때문이죠.
그들은 서로 경쟁자였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에 자극을 받으며 최고의 기록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경쟁이고, 진정한 스포츠죠.

그러나 인상을 찌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국은 금메달을 예상했던 남자 쇼트트랙 계주 경기에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금메달은커녕 메달 자체를 얻지 못했죠.
이 경기에서 우리와 라이벌인 중국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중국 텔레비전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아나운서가 평창올림픽에서 가장 즐거웠던 장면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중국쇼트트랙 선수 한 명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국대표팀이 넘어졌을 때”

가장 치졸한 경쟁이 상대방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일 때입니다.
나의 최선이 아니라 남을 짓밟아서 얻으려는 승리가 가장 치졸한 승리이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정치가 딱 그 모양입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고 정치가 남의 험담을 나의 이로움으로 만드는 것이 되었습니다.
내 진영을 위해 상대방의 문제는 더 들추고, 나의 문제는 알아도 숨기고 합니다.
같은 편이면 그것이 설혹 잘못이어도 없던 것이 되고, 상대편이면 그것이 비록 훌륭한 것이어도 모든 거짓과 가짜뉴스를 동원해 험담하고 모략하는 것이 정치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는 없고, 선한 판단도 없습니다.
정치의 사고에 빠지면 올바른 판단이 무시됩니다.
무조건 유대는 좋고, 로마는 무조건 나쁜 것이 됩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향 사람들은 좋고, 타향사람들은 나쁩니다.
내가 속한 그룹에게는 한정 없이 너그럽고 그렇지 않은 그룹에는 인색합니다.
그곳에 정의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던 아니던 상관없이 말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정치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끝까지 정치적이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십니다.
정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말입니다.
이분법적인 사고구조에서 벗어나라고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기준 삼으라고 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정치적 잣대로 구분하지 마세요.
제발 좌우의 대립으로 가치를 판단하지 마세요.
오직 옳고 그름은 주님의 말씀으로 정하세요.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무조건 옳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무조건 싫은 정치적 이분법에서 벗어나세요.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정의를 바라 볼 수가 없어요.
오직 가치판단은 주님의 말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히 주님을 따라 그리스도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 기준이 성경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향 또한 가치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내가 자라난 배경, 내가 배운 학식, 내가 익숙해 있든 사고가 정의는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께로 돌아가세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준 삼으세요.
복잡한 정치적 수 싸움을 그치고, 말씀으로 돌아가는 여러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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