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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3]길 THE WAY

1. 알고도 가는 길

1. 나귀 타신 예수님

예수님 인생에서 모든 일상의 일들을 뒤로 하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신 기간은 꼭 3년이었습니다.
그 기간을 우리는 공생애라고 부르지요.
굳이 풀이하자면 공적인 사역을 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라는 지역에서 보내셨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나셨지만 나사렛에서 자라셨고요.
이스라엘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잘 안 잡히시죠?
공식적인 이스라엘의 면적이 20,770제곱킬로미터이니까요.
우리 강원도 면적보다 조금 크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강원도를 비교해서 보자면 베들레헴은 거의 중간이니까 홍천군쯤 되고요.
강원도 지리를 잘 모르시나요?
대충 비교하는 것이니까 서울로 치자면, 용산구나 마포쯤 되겠네요.
이에 비해 나사렛은 강북구나 도봉구쯤 됩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셨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였던 요셉의 거주지였기 때문이었고요.
베들레헴에서 나신 이유는 호적 정리를 해야 한다는 명령에 따라 예수께서 태어나실 즈음에 소위 본적지에 가서 신고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사렛에서 일상의 일을 하시다가 30세가 되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요.
말씀드렸다시피 갈릴리지역에서 주로 사역하셨습니다.
나사렛과 갈릴리는 그리 멀지 않은 지역입니다.
그렇게 사역을 하시던 주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데요.
이 예루살렘이 왜 중요 한고하니 이곳이 유대인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경제적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유대인의 중심지였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비록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지만 사람들은 그의 가는 길 위에 자신의 옷을 벗어 깔았습니다.
유대인에게 겉옷의 중요성을 말씀드린 적 있죠?
그 옷으로 레드 카펫을 깐 셈이죠.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가지도 꺾어서 길에 깔았습니다.
종려나무가 어떻게 생겼냐면 이렇습니다.
보통 야자수라고 하는 나무가 종려과 나무들입니다.
종려나무가지를 깔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종려나무가 가지는 영적인 의미들이 있기 때문이죠.
안식과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고, 찬양의 뜻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종려나무가지가 넓게 펴져 부채 살 모양을 하고 있어서 길에 깔기도 좋았거든요.
그렇게 펼쳐 놓은 길을 통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찬양도 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호쉬아 나”입니다.
헬라어로 음역해서 호산나가 되었는데요.
“호쉬아 나”에서 “나”는 “지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호쉬아”는 무엇일까요?
많이 들어본 단어 같지 않습니까?
“호쉬아” “호세아” “여호수아”라는 말이고요.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되죠.
참고로 예수라는 이름도 호세아, 여호수아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같은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2. 슬프고 아픈 길

저는 어릴 적에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로 시작되는 찬양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찬양들은 참 경쾌하고 멋진, 마치 행진곡처럼 느껴지는 곡들이지요.
아마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장면을 상상하면 그런 활기찬 음악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그 때 즈음 또 다른 행렬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군사들을 앞세우고, 땅이 흔들릴 만큼 우렁찬 말발굽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행렬이었습니다.
그 맨 앞에는 로마제국을 대신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있었습니다.
본래 총독의 관저는 예루살렘에서 100km쯤 떨어져 있는 [가이샤랴]였는데요.
그가 예루살렘에 온 이유는, 해마다 유월절이면 유대인들이 모이는 예루살렘에 있을지도 모를 민중봉기를 막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헤롯궁전에 머무는 것이 관례가 되었기 때문이죠.

말은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상징입니다.
지금도 말을 탈 수 있다는 것은 부의 상징이기도 하니까요.
그들의 쩌렁쩌렁한 말발굽 소리에 모든 이들은 떨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위세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옷을 바닥에 깔아도 나귀 위에 앉은 예수님은 그저 소꿉장난에 불구하죠.
아무리 위대하게 보려고 해도, 예수님의 행렬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오히려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가여워 보일 뿐이죠.
그러나 그것보다 더 슬프고 아픈 것이 있어요.
행렬이야 초라하면 어떻습니까?
작은 나귀 타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갖출 것은 다 갖췄는데요.
인원이 작으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함께 해주는 이들, 함께 기도하고, 눈물 흘려줄 분들이 계시다면 그들이 적은들 어떻습니까?
그런 것들은 슬프지 않습니다.
정말 아프고 슬픈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장인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면서 예수님이 12제자들을 따로 부르셔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20:18~19 “보아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며, 그를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서,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달아서 죽게 할 것이다.

이 장면을 여러분이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할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모르면 좋겠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모르면 어찌 한번 해 볼 배짱을 부려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잘될 것을 생각하고 용감하게 나갈지도 모르고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가지고 나가면 그나마 용기가 생기겠죠.
그런데 이미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일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알고도 가시는 겁니다.
요한복음12장에는 그런 예수님의 심경이 적혀 있습니다.
요한복음12:27~28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이 말씀은 아까 우리가 공동체 말씀 교독에도 나왔던 말씀이죠.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음미해 보세요.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이 괴롭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괴로우셨는지는 이어지는 말씀으로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겟세마네동산에서 하셨던 기도와도 동일합니다.
마가복음14:36, “아버지여,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예수님은 이 길을 이미 알고 오신 것이죠.
지금 이 길이 죽음의 길인 것을, 고통의 길인 것을 알고 걷는 행렬이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은 환호할지 모르나 예수님은 슬프고도 고독한 길이지 않았을까요?

그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말씀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 뭔지 아세요?
눈치코치 없는 제자들은 이 와중에도 누가 큰 자가 될까? 논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잘될까를 고민하는 거죠.

3. 우리의 인생은 모두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 길을 갈 수 있으신가요?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 잔을 마실 수 있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언제나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살 거예요.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그래도 지금보다는 좋아지지 않을까?”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우리의 기대가 되죠.
죄송한 이야기지만 결혼하신 분들, 결혼하면 지금보다 나아질 것을 꿈꾸고 하셨습니까?
혹시 결혼이 아프고 어렵고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신 분은 안 계신가요?
만약 결혼이 지금처럼 어렵고 힘겨운 것이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때로 돌아간다면 여러분은 포기하셨을까요?
어려움을 알고도 갈 수는 없는 길입니까?
슬픔을 알고도 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까?
고통을 알고도 떠날 수는 없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은 늘 희망입니까?
여러분의 선택이 아픔을 알고도 가는 길, 죽을 줄 알고도 가는 길이 될 수는 없나요?

외람되지만 여기 있는 분들 중에 단 한분도 영원히 이 땅에 사는 분은 안 계실 겁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 다 죽는 존재라는 것이죠.
우리는 곧 죽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같은 사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슬픔을 알고는 그 길 못가시잖아요?
여러분은 아프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못 가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인생은 사십니까?
우리의 인생이 곧 죽는 인생인데요.
우리 인생의 끝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다 아시는데 어떻게 사십니까?
왜 이 인생길은 가십니까?

저는 지금 그러니까 인생을 포기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본래 죽을 것을 알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해요.
우리는 언젠가는 죽어요.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죽을 것을 알고 살아가는 인생들이잖아요.
그런데 왜 그리 성공에 목을 매며 살아야 합니까?
그런데 왜 그리 높은 곳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까?
마치 영원히 안 죽을 사람처럼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영어단어 가운데 passio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기독교인에게는 “수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죠.
우리가 새벽기도회를 하는 고난주간도 영어로 passion week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 단어는 주로 일반사람들에게는 “열정”이라는 말로 통합니다.
어쩌면 십자가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이 땅의 사법제도에서는 수난을 당하는 것으로 점철된 사건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꾼다는 것은 수난을 각오한 시작이라는 것이죠.

제가 중국선교사로 있을 당시, 저의 신분은 사업가였습니다.
이래 뵈도 중국내에서 컴퓨터학원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고요.
기타 지역에 상점도 2개, 소규모지만 국수공장은 3개를 보유한 제법 그럴싸한 사업가였어요.
컴퓨터학원은 평양과학기술대학에 컴퓨터를 제공할 만큼 능력이 되었고요.
국수공장도 잘 운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것을 잘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돕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에요.

제게는 신앙의 철칙과도 같은 좌우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모자라니까 하나님께서 도우신다.”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완벽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일이 없다”는 말과도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나 혼자 잘하겠다는 생각을 늘 떨쳐 버리려고 힘쓰고 애를 씁니다.
유학 가거나 목회를 나가는 후배들에게 가장 먼저 하는 기도가 ‘돕는 이들을 세워달라’는 것이고요.
아마도 우리교회가 저 혼자 이만큼 키운 줄 아시는지 모르지만 사실 초창기부터 효정전도사님이 함께 안하셨으면 아마 힘들었을 거예요.
강 목사님도 마찬가지고, 진형전도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오전도사님 안 계시면 교회가 안 돌아갈 겁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이 마찬가지이고요.
뿐이겠습니까?
다림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더샘의 헌신이 없었다면 다림교육은 시작되 못했을 거예요.
혜영샘이 버텨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벌써 접었겠지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월급도 없이 5년씩이나 함께 해준 아영샘 없었으면 돌아갔겠어요?
우리 다림이 씽씽마치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수영샘이 헌신 안 해줬으면 그런 일들 못했죠.
지금도 14개 학교, 50명의 고교 멘토들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다림이 지속될까요?
저에게는 돕는 자들의 축복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죠.

중국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만난 이후 함께 했던 그 놀라운 일들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중에 상점과 국수공장을 통해 일을 했던 김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신데요.
이분이 중국 깡패출신이세요.
예수 믿는 부인 만나서 예수 영접한 이후에 삶이 달라진 분인데요.
우리교회에서도 아내 때문에 교회 나오는 남편들이 계신데요.
예수 믿는 부인 만나서 삶이 달라진 남편이란 소리 듣는 집사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상점과 국수공장을 도맡다시피 했어요.
한번은 국경 다리 앞에서 떠나보내는데요.
그날따라 짐에는 밀가루와 식료품뿐만 아니라 작은 성경책도 몰래 가득 실고 들어가는 날이었는데요.
정말 위험한 일이라 걱정이 되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자기가 깡패일 때는 여러 번 칼 맞고 총 맞았데요.
그렇게 사경을 헤맨 적도 3번이나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때는 자기가 살려고 그렇게 싸우고, 살려고 몸부림쳤데요.
그랬더니 죽을 고비들이 닥치더래요.
그런데 예수 믿고는 자기가 깨달은 게 있다고요.
우리는 언젠가는 다 죽는다고요.
전에는 그 사실을 몰라 살려고 발버둥 쳤는데 생각해보니 빨리 죽냐? 늦게 죽냐?는 문제뿐이더래요.
예수 믿고는 거룩하게 죽기로 했다는 거예요.
이왕 죽는 것 가치 있는 일,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 하다가 죽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 어깨를 치며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김 선생, 그런데 죽겠다고 이 일 하니까 도리어 안 죽네? 아직 내가 할 일이 있나봐”

4. 어려움인줄 알고도 가는 길이 믿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죠.
사랑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요.
지난 금요일 묵상에서 저는 유진 피터슨목사님이 번역한 성경구절을 읽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서5장 2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더군요.
에베소서5:2, 그분은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사랑하셨습니다.(메시지역)

자신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일인지를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그것을 알고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죠.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즐거워서 사랑이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슬픔이 있다고 사랑이 아닌 건 아니죠.
사랑은 아픔을 알고도, 괴로움과 힘겨움을 알고도 그 길을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픔을 알고도 분만실에 들어가는 엄마들처럼 말이죠.

믿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길이 기대만큼 늘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늘 두둑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죠.
많은 도전과 방해들 속에서 하루하루가 전쟁과 같은 삶입니다.
그런데 본래 그런 줄 알고 걷는 길이 믿음의 길이에요.
세상의 기쁨은 지금보다 더 낫고, 높고, 많은 길이 주어져야 갖게 되는 감정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내가 어려울 줄 알고, 고통과 고난, 슬픔과 아픔을 알고 간 길인데, “그래도 견딜 만 하네?”라고 느껴질 때 주어지는 희열입니다.
이것 정말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주님의 기쁨은 아플 것이라고, 힘들 것이라고 알고 갔는데, 그것을 견뎌내고 있는 나를 보며, 그것을 견딜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보며 느끼는 희열이라고요.
그 기쁨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세상과 다르다고 하셨죠?
저는 이것이 뭘까 늘 고민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 깨닫는 것은, 주님 주시는 평안이라는 것이 지금보다 나아지는 평안이 아니더라고요.
고생길인 줄 알면서, 죽을 길인 줄 알면서, 그래도 그 길이 옳은 길이어서 걸어갔더니 의외로 괜찮아서 그 때 느끼는 평안함,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이더라고요.
내 앞에 놓인 길이 누가 봐도 고생이 뻔한 길이에요.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다 반대하고, 말려요.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 가야만 하는 길이라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걸어갔더니, 생각보다 어렵지가 않아요.
그때 느껴지는 평안함, 기쁨, 누려본 적 있으세요?
십자가는 다 죽는 길인데, 걸었더니 살아요.
그때 누리는 기쁨, 평안함, 안식이 주님이 주시는, 허락하시고, 기뻐하시는 기쁨입니다.
안다면 갈 수 없는 길, 그 길을 알고도 가는 여러분 되세요.
예수님처럼 말이죠.
그 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돕는 것, 참 부질없는 짓이고, 힘겨운 짓이죠.
그러나 알고도 가세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 그것은 잠도 이루지 못하고, 가슴앓이로 고통스러운 일이죠.
그래서 차라리 머리에서, 마음에서 도려내고 싶은 일이지만,
그러나 알고도 가세요.
그 길이 좁은 길이고, 그 길이 낮은 길입니다.
안다면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길, 그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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