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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3]길 THE WAY

6. 종교를 벗어나는 길

마태복음23:24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1.
일전에 소개드렸던 책, [지구가 만약 100인의 마을이라면]에는 지구를 축소해서 그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눈에 확 들어오는 거죠.
가령, 지구를 100인의 마을로 계산을 해보니 지갑에 돈이 있는 사람은 8명이고요.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은 7명,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면 2명 안에 드는 사람이고, 대학교육을 받았다면 1명 안에 듭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어때요?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것을 가졌는지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 위를 보죠.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래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많이 가질 것을 꿈꾸지 말고, 가진 것을 나눌 꿈을 꾸라고 말이죠.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축소해 볼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인생을 1년이라고 하면, 아니 한달, 아니면 하루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떠실까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시겠어요?
예수님의 고난의 첫 걸음은 우리에게 그 마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은 언젠가 주님 앞에 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죠.

2.
예수님은 성전에서 우리의 영적인 모습도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 그 목표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진배없음을 각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쓸어버리길 요구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지를 성전에서 알려주시죠.
우리의 신앙이 내 욕심으로만 채워져서 그렇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도 나의 욕심에 의한 작용입니다.
내가 더 칭찬받고, 내가 더 얻기 위해 누군가를 돕고, 봉사를 하는 교회에 경고하십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나의 이기적인 신앙을 버리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죠.

3.
그렇게 성전을 쓸어버리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귀중한 영적인 법칙 하나를 제공하십니다.
그것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후 필요한 모든 것은 주님이 채우신다는 영적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신기한 면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분량의 먹거리를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면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고 놀라고 더 극적인 효과가 있을텐데요.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신기하게도 그 이적은 있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누니까 생기는 규칙을 가지고 있죠.
이런 이적은 구약의 엘리야 때도 있었습니다.
사르밧과부의 집에 찾아갔을 때이죠.
사르밧과부가 자신의 모든 걸 주를 위해 내놓자 그 집의 뒤주에 밀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질 않았죠.
우리가 최선을 다할 것은 주님의 나라와 뜻이고요.
주님이 최선을 다하시는 것은 그런 우리를 돌보시고,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4.
이 영적인 법칙은 권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원했던 것은 자신들의 권리였거든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도 먹을 권리 말이죠.
사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의 것이 곧 우리의 것이었는데요.
우리는 권리를 주장하면 더 얻을 줄 알았지만 결국 있던 것 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권리로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에스, 혹은 노의 권리를 내려놓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권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려놓으면, 주님이 우리의 이름이 되어주시죠.

5.
어제는 세금 논쟁에서 메시지를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냐? 유대냐? 황제냐? 하나님이냐? 이런 구분에 참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기준이셨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는 소위 진영논리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간혹, 저의 설교 주제를 가지고 어떤 분들은 진보적 성향이 있다는 소리를 합니다.
저는 좌파가 뭔지, 진보가 뭔지 잘 모릅니다.
그런 공부를 해본 적도 없고, 소위 제가 386세대인데 그 당시 흔하디흔했던 운동권교육 한 번 받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저의 사고는 진보적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보수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더 수긍이 갈 것 같습니다.
내면에는 가부장적인 사고가 존재하고, 흐르고 있는 차별도 있습니다.
제게 배려심이나 사랑이 많다고 하는 분들이 계신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 속의 이기심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정말 딱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제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한 이후, 저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읽다보면 제 속의 이기심을 도저히 용납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찾다보면 나만을 위해 머리를 쓸 수 없었어요.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내 안의 성향과 싸워야 가능했습니다.
싸우고 싸워 그래도 조금이라도 주님의 마음 닮자고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다 제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에요.
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제로 제 생각, 제 뜻 전하고 싶어요.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보면 볼수록 주님의 말씀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죄송한 이야기지만 저도 가끔 여러분들의 눈물을 훔칠만한 감동적인 설교 하고 싶어요.
감성을 자극하는 설교하고 싶은데요.
그렇게 마음먹고 설교준비를 시작했다가 이내 포기하고만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때마다 강단은 주님의 말씀이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같았거든요.
말씀만은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준비하라고 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사람의 인기나 칭찬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묵상만 울리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저의 설교가 참 드라이해요.
그 점 죄송합니다.
그러나 본심을 이해해 주시기를 빌 따름이에요.

저는 이 세금논쟁을 읽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헤롯당원들의 집요한 트집에 예수님이 잘 대처하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재치있으시다”라는 것 알려주려고 이 성경에 기록한 것은 아닐 거잖아요.
“예수님이 센스있으시네?” 혹은 “헤롯당원을 물리치셨데?” 뭐 이런 것이 주제는 아니잖아요.
저는 읽고 또 읽고, 그리고 기도하고, 주님께서 생각주시기를 기다렸는데요.
그때 주신 생각이 이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있는 존재들이잖아요.
그런데 그 안에서 로마를 택하느니, 하나님을 택하느니 이런 싸움이 왜 필요해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이잖아요.
그런데 내 편이니 네 편이니, 이게 뭐가 중요합니까?
내 나라가 좋으니 네 나라가 좋으니 이게 무슨 소용이 있고요.
서로 사랑하라는 명제에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지 않습니까?
계급도, 출신성분도, 나이나 성별도, 필요 없이 온전히 주님의 자녀로 봐야 하잖아요.
특별히 사랑이라는 것은 나와 다르고, 나와 척을 진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잖아요.
저는 북한을 사랑합니다.
제가 종북이어서 북한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그들이 우리의 원수여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말씀이잖아요.
누가복음6:32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주님의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나와 다르고, 나를 대적하는 이들이 주체라는 사실을 아시잖아요.
그런 사실을 알면서 어찌 상대방을 때려잡으라는 소리를 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든 가치판단의 중심이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쉬운 일이에요.
그런데 뭐가 어려운줄 아세요?
내가 가지고 있던 관습, 습관, 흐르는 습성들을 버리는 것이 어려워요.
그런데 가만히 놔두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그만 그 습성대로, 관습대로 자연스레 흘러서 예수를 잃고 맙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싸워야 해요.
나의 옛 자아와 싸워야 합니다.
실패해도 괜찮아요.
회개하고 다시 싸워야 합니다.
정치적인 습관, 내 속에 흐르는 전통적 가치, 이런 것들을 기준 삼았던 삶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기준을 바꿔야 해요.
그래야 주님의 길을 온전히 갑니다.

6.
오늘은 예수님께서 작심하고 쏟아내는 말씀 앞에 섭니다.
마태복음23장 이후부터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은 매서우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지요.
마태복음23:11~12,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 말씀이 여기서 나옵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오늘날 교회와 지도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높아지는 일이 아니라 낮아지는 일입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좋은 자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불편한 자리로 가는 길입니다.
주를 따르는 영성은 나를 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내 힘을 소진하는 것이죠.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거꾸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히려 군림하려고 하고, 오히려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위선자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셨습니다.
그의 독설은 물불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의 가장 큰 근거는 따로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율법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율법은 크게 2가지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제한 제사와 예배에 대한 규정인 “제사법”이 그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일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규정인 “시민법”이죠.
아마도 제사법에 대해서는 알고 계셨을테지만 시민법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와 목사들이 제사법에 대해서는 지키려고 애를 쓰며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 유대지도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제사와 의식, 그리고 형식은 세세하게 따지고 지켰습니다.
그러나 시민법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습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강도 만난 사람 앞에 나타난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그들은 모두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강도만난 자를 본체만체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이 왜 그냥 지나갔는지 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무서웠을 수도 있고, 귀찮거나 힘들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책임한 자들로 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그들 또한 강도 만난 자를 돕고 싶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불결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제사를 위해 한 사람을 지나쳤을 것이라고 생각해 주고 싶습니다.
레위인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꼭 지키고 싶은 것은 제사법이었고, 자신들의 직분에 관한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에 직면한 한 시민에 대한 도리는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시민법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시민법은 중요하지 않은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3장을 넘어오기 바로 전, 22장에는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또한 트집을 잡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태복음22:37~39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제사법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이라면, 시민법은 이웃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느냐고요?
천만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목숨처럼 생각하는 것은 귀하디귀한 일입니다.
그런데요.
여기에는 한 가지 가시가 있습니다.
요한1서4:20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시민법에 대해 소홀한 자가 제사법을 온전히 드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인식이 없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제사와 그들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성경말씀대로 아무리 화려해도, 죄송하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제사법만 가진 율법은 종교입니다.
시민법만 가진 율법도 종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23:24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다시 말하면 제사법은 지키면서도 시민법은 버렸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행태가 자행됩니다.
종교적인 의무에는 충실합니다.
그것만 하면 모든 것을 다한 듯 가르치고,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일에 교회만 나오면 되고, 십일조만 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의롭고 자비롭고 이웃과 사는 것에는 소홀합니다.
긍휼을 베풀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습니다.
개신교 장로인 전직 대통령은 하나님 잘 믿어서 돈 많이 벌었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은 대부분이 권력을 가지고 사기치고 빼앗은 돈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에서는 은혜가 되어버렸고, 축복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사법만큼이나 사회에서 정의롭고 선하게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이웃으로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님께 하듯 이웃에게, 옆 사람에게, 가족에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 하듯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소외된 자들을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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