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묵상일기 364 - 진정한 신앙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2025. 8. 10. 13:47ㆍ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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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23:6~12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서 물었다.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오?" 그는 예수가 헤롯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서, 예수를 헤롯에게 보냈는데, 마침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하였고, 또 그는 예수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여러 말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곁에 서 있다가, 예수를 맹렬하게 고발하였다. 헤롯은 자기 호위병들과 함께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였다. 그런 다음에, 예수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원수였으나, 바로 그 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매일 묵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행적들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잘 따라오고 계시죠?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리에게 잡히신 후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사실, 대제사장이 유대의 권력자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함부로 잡아가도 되는 존재는 아닙니다. 불법 체포 및 구금에 해당하는 행위죠. 어쩌면 그동안 무시당했다는 앙심에 자신의 힘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일까요? 대제사장은 유대 공의회에 예수님을 넘기죠. 이미 아시다시피 산헤드린이라고 불리는 유대 공의회는 유대 사회의 자치 최고 의결 기구였습니다. 정치적, 행정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신성 국가였던 이스라엘의 종교적 재판 기능이었죠. 공의회는 의장인 대제사장과 함께 70명의 구성원으로 조직되었는데요. 구성원이 70명인 이유는 유래가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민수기 11:16~17 주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이스라엘 장로들 가운데서, 네가 백성의 장로들 또는 그 지도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 일흔 명을 나에게로 불러 오너라. 너는 그들을 데리고 회막으로 와서 그들과 함께 서라. 내가 내려가 거기에서 너와 말하겠다. 그리고 너에게 내려 준 영을 그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서, 백성 돌보는 짐을, 그들이 너와 함께 지게 하겠다. 그러면 너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땅으로 향하는 과정이었는데요. 지도자인 모세와 함께 힘을 합하여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70명의 지도자를 세워주시는 내용이죠. 이것을 기원으로 하여 유대 공의회는 70명의 지도자로 구성되었던 거죠.
그곳에서 그들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덮어씌웁니다. 신성모독은 유대에서는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였죠. 그러나 유대 공의회는 사형을 구형할 수는 있어도 사형을 판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겁니다. 하루 사이 대제사장의 집, 유대 공의회, 그리고 빌라도 법정까지 사방으로 끌려다니셨던 거죠.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서 23:6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서 물었다.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오?”
여기서 빌라도가 들었다는 ‘이 말’은 바로 전 구절의 말씀이죠. 이 말을 다시 들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서 23:5 "그 사람은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를 누비면서 가르치며 백성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이냐고 직접 물어봤던 거죠. 이 구절이 주목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구절 하나로 예수님께서는 헤롯에게로 다시 끌려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사형을 판결할 만한 어떤 죄를 찾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에게야 신성모독이 중요한 이슈겠지만 로마인이었던 빌라도에게는 이게 별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당시 로마는 다양한 신이 존재하는 그야말로 다신교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정도면 태형 정도로 그치는 것이 예사였죠. 그런데 완강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고소에 핑곗거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 핑계가 바로 헤롯에게 미루는 것이었죠.
여기서 조금 복잡한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잡하지만 아주 간단하고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그런데 로마의 식민 정책은 주로 간접 통치 형태였어요. 그러니까 식민지를 속국으로 만든 후 그 지역의 유력자를 세워 자치를 부여했던 거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롯 가문을 왕으로 세워 간접 통치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 헤롯 가문이 사실 유대인이 아닙니다. 에돔사람이죠. 혹시 에돔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경의 인물을 아십니까? 야곱의 쌍둥이 형제 에서의 별명이 에돔이죠. 그런데 그 이후 둘은 갈라져서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고, 에서는 에돔의 조상이 됩니다. 에돔은 현재 요르단 남부 지역에 있었던 고대 도시국가였지만 현재는 사라진 상태죠.
그런데 어떻게 헤롯 가문이 유대의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도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헤롯 가운데 가장 유명한 헤롯은 예수님이 태어날 때 왕이었던 헤롯인데요. 그를 우리는 헤롯 대왕이라고 부르죠. 그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모양이에요. 로마의 내전이 있을 때 그는 훗날 아우구스티누스 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하면서 그의 환심을 샀죠. 그런 로마 정치권의 지원으로 유대의 왕이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헤롯은 늘 불안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동방박사가 유대의 왕이 나셨다고 하자 예수를 찾아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헤롯 대왕과 예수님 사이 인연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다음은 그의 아들들이죠. 헤롯 대왕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습니다. 헤롯 아켈라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2세가 그들이죠. 헤롯 대왕이 죽자, 유대인들은 헤롯 가문의 왕위 세습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국왕 제도를 없애고 분봉 왕 제도를 도입하죠. 분봉 왕이란, 영토를 나누어서 다스리는 왕을 뜻하죠. 그래서 첫째였던 아켈라오는 가장 넓은 지역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맡았고, 둘째인 안티파스는 갈릴리 지역과 요단강 동쪽, 베뢰아지역을 맡았죠. 셋째였던 빌립2세는 현 시리아 지역인 바타네아를 통치했습니다. 여기서 중심인물은 아켈라오이지만 그는 왕좌에 오른 후 갖은 폭정으로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서 2년 만에 폐위가 되죠. 그래서 그 지역을 총독이 대신 통치하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인물은 안티파스인데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이 바로 안티파스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을 죽인 인물로도 유명하죠. 그러니까 갈릴리 사람인 예수를 갈릴리 통치자인 헤롯 안티파스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때마침 헤롯 안티파스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본래 거주지는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티베리아스였는데요. 우리말 성경에서는 디베랴로 더 잘 알려진 곳이죠. 이제 다음 구절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누가복음서 23:8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하였고, 또 그는 예수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고 하죠. 오늘 우리가 묵상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을까요? 헤롯이 예수님을 사모하거나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겠죠?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보고 싶어 했을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 그 속에 담겨있는 인간의 문제들이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오늘 본문은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던 이유를 자세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누가복음서 23:8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하였고, 또 그는 예수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가르침을 받거나 자신을 고치려는 태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신기한 기적을 보고 싶었을 뿐이고요. 때론 그런 기적을 자신이 써먹을 수는 없을까 싶기도 했을 테죠. 그런데 이런 태도는 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진짜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의 말씀 앞에 엎드리고 있나요? 주님의 가르침으로 매일 나를 새롭게 하고자 합니까? 지난주 어느 분이 은혜로운 묵상 글을 제게 보내주셨습니다. 거기에는 서두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사실 이렇게 묵상 글을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처럼 살아내는 것이다.’ 저는 그 글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글이 정확히 진리였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어떤 분의 이야기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어떤 시인이, 이전에는 간절히 시인이 되고 싶었답니다. 그리고 시인이 되었데요.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간절히 시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그러시더래요. 이제는 시인이 아니라 시처럼 살고 싶어졌다고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교인이 되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진짜는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는 것이란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뭔가 은혜로운 현상을 보고 싶어 하고, 때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려고 기적을 바라기도 하죠. 그런 모습이 마치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아니 저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저는 제 안에서 헤롯이 오버랩 되기는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읽은 오늘 본문 8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서 23:8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하였고, 또 그는 예수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다.
이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싶어 했던 이유는 따로 있는 듯합니다. 뒤에 언급된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부가적인 내용이죠. 그러니까 보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고, 그 이유와 함께 ‘기적’도 보고 싶었다는 뜻이죠. 그런데 그 보고 싶은 이유는 오늘 본문에 따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우리는 찾아보아야겠죠. 우리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고요. 여러분은 왜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던 이유가 곧바로 떠올랐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이유보다 더 먼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유가 떠올랐죠. 그만큼 제게는 뻔한 이유였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굳이 세세한 내용을 적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제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힌트를 드릴까요? 그것은 세례요한과 연결됩니다.
아시다시피 세례요한은 이른 나이에 참수를 당했습니다.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 때문이죠. 세례요한은 안티파스의 악행을 고발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죽임을 당하죠. 그런데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뜬금없이 이렇게 물으십니다.
누가복음서 9:18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제자들이 대답하죠.
누가복음서 9:19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은 사람들, 그러니까 갈릴리 전역에 퍼져있는 소문과 같은 말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곳을 통치하는 헤롯 안티파스가 모를 리가 없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요.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이 소문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문 아니었을까요? 그는 아마 두려웠을 것입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이, 다시 살아나 자신 앞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가 느꼈을 감정은 경외나 기대가 아니라, 아마도 섬뜩한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혹시나 자신이 저지른 죄가 드러나지는 않을까, 그 끔찍한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진리를 찾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고 싶었을 겁니다. '과연 진짜일까? 내가 죽인 요한이 정말 저 사람일까?' 하는 의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심정으로 말이죠.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과 닮아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과연 어디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가치를 세상에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헤롯처럼, 내 안에 감춰진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주님을 멀리하면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하며 억지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 가면 왠지 불안해', '헌금 안 하면 복 못 받을 것 같아', '기도 안 하면 일이 잘 안 풀릴 것 같아'와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물론 주님에 대한 경외심, 다시 말해 두려움은 신앙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잠언 9:10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헤롯이 느꼈던 죄의 심판에 대한 공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크신 사랑과 거룩하심 앞에 서 있는 우리의 경외심, 그 거대함 앞에 압도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사랑과 신뢰의 다른 이름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그의 책 [정신 현상학]에서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노예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노동을 통해 주인을 뛰어넘는 존재가 된다는 개념이죠. 그러나 헤롯의 두려움은 이와 같은 생산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죄책감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그저 막연한 두려움에만 기초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님의 종속적인 노예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헤롯이 보지 못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구원의 자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을 통해 자신의 죄가 사함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놓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는 것은 헤롯의 불안입니까, 아니면 십자가 사랑에 대한 감격입니까? 이제 우리는 헤롯의 두려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동기가 혹시 두려움이나 불안이라면, 이제는 그 자리를 굳건한 사랑과 믿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주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기쁨과 감사로 동참하는 삶,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얻는 진정한 자유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사랑으로 채워진 기쁨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우리 공동체 가족들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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