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묵상일기 239 -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울며 일어나 함께 걷기 위해 택함 받은 존재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2025. 3. 4. 05:00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반응형

누가복음서 11:37~41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자기 집에서 잡수시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들어가서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가 잡수시기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꿀 같은 휴일을 지나고 다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같은 화요일입니다. 귀한 쉼을 지난 만큼 좋은 마음으로 이번 주를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복음에서 기록한 그 바리새인은 전형적인 바리새인이었던 것으로 보이죠. 전형적이라는 것은, 교리와 전통으로 누군가를 정죄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누가복음서에서는 벌써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그 집에 향유를 든 여인이 나타났었죠. 이번에는 식사 예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식사 전에 예수께서는 손을 씻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에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이상하게 여겼다고 누가복음은 기록합니다. 사실 이 표현은 정중한 표현이죠. 이상히 여겼다는 것은 돼먹지 못한 인간 취급을 했다는 정도가 더 맞을 거예요. 왜냐하면 유대인에게는 정결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요. 바리새인들은 이 정결법을 목숨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식사 이전에 손을 씻는 행위가 정결법에 속한 것이었죠. 그런 의미로 보면 예수님이 잘못하신 거죠.

 

그런데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식사 전 손을 씻는 일은, 청결의 문제라기보다는 종교의식의 문제였습니다. 이는 레위기의 정결법에 기초한 것이었죠.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정결법은 단순한 의식의 문제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는데요. 마치 우리가 식사기도를 하는 것과 같은 변질입니다. 생각해 보면 식사기도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주님께 감사하며 드리는 기도죠. 그런데 지금은 단순히 식사 전 마치 의식행사처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식사기도를 두 번 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 조금 전 식사 기도를 했는지조차 기억을 못 해서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에 응하신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도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게 겉으로만 하는 행동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여기는 오만을 지적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분리된 자라고 스스로를 부르게 된 이유는 이방문화와 관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리새파라는 종파가 시작될 당시, 유대는 헬라문화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그때 이들은 유대교를 지키기 위해 이방 문화와 구별된 길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분리'는 구별된 '거룩'을 의미했죠.

 

그런데 그들이 점점 더 세력을 넓히며 유대교의 주류가 되자, 이제 그 '분리'는 '거룩'이 아닌 '차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경제적, 신분적, 종교적 차이를 구분하며 정죄의 방향으로 흘렀던 거죠. 그 대표적인 모습을 누가는 그들의 기도로 보여준 바 있죠.

 

누가복음서 18:11~12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것이 그들의 거룩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까지 정죄하는 그들이죠. 

 

어떠신가요? 바리새인들의 변질에 대해 거부감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요? 진리를 위해 탐욕과 전쟁, 다툼, 시기, 질투로부터 구별되어, 서로 자기 것을 나누며, 사랑과 은혜를 나눴던 교회는 지금 어떤 모습이 되었나요? 교회의 기득권을 위해 용서와 용납의 대상이었던 나와 다른 이들을 향해, 구별되고자 했던 탐욕과 전쟁, 다툼과 차별을 일으키고 있는 현대 교회의 모습은 바리새인 못지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좁게는 이 사회, 이 지역, 이 가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 선택은 정죄하는 구분이 아닌, 낮고 겸손한 자로의 선택입니다. 늘 서로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 사회에서 늘 친절함과 온유함을 잃지 않는 자로의 선택이고요. 분노와 좌절로 쉽게 정죄하는 인간관계 속에서 오래 참고, 용납과 용서를 이루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으로의 선택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바리새인과 같은 구별이 아닌, 하나님의 사명을 품은 구별된 공동체였으면 좋겠습니다. 쉽게 정죄하여 돌을 드는 바리새인이 아닌, 언제나 선한 마음으로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선한 이웃이 되어주는 거룩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감싸 안기 위해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울며 일어나 함께 걷는,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택함 받은 존재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이고, 또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