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묵상일기 50 - 일꾼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일합니다.

2022. 10. 31. 07:01묵상하는말씀/고린도후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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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6:3~5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주말 우리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 충격 때문에 좋은 아침이라는 말조차 어려울 만큼 가슴에 돌덩어리를 얹어놓은 듯합니다. 그럼에도 이 아침 좋은 아침을 외칩니다. 모든 아픔과 슬픔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의 시간은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주님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중에도 선한 일을 하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신실한 주님의 자녀인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슬픔을 앞에 두고 우리는 생명과 슬픔,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문화와 이념, 세대와 가치 등의 문제로 그 슬픔을 왜곡하고 아픔을 비토하는 상식 밖의 태도에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저 위로와 기도만이 우리의 사역임을, 그저 주님의 선하신 어루만지심만이 우리의 바람임을 잊지 않기를 바래요. 안타까운 사고에 희생된 이들의 영혼과 비통에 빠진 가족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울은 6장에 들어 지금이 은혜받을 때라고 선포했죠. 이는 지금이 행동할 때이며, 지금이 준비된 때라는 뜻입니다. 바로 생각을 현실화하고, 믿음을 삶에 적용해야 하는 때라는 뜻이죠. 그러면서 그는 믿음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참 대단한 사람인 것은,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음에도 그것이 주님의 이름에 누가 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면 하지 않겠다고 고백하죠. 자신의 권리보다 주님의 이름을 더욱 우선하고,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죠.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고 고백했던 그의 다짐이 헛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거죠. 

 

이어 4절에서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개역성경으로 읽어야 조금 더 묘미가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해 놓았죠.

 

고후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개역 개정본)

 

'자천'이라는 말이 눈에 띄죠. 이 말은 스스로 추천한다는 뜻이죠. 별거 아닌 것 같은 단어인데 이 단어가 눈길을 끄는 것은 이미 이 단어가 고린도후서에 여러 번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번역에서는 다른 여러 단어로 번역되어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개역 개정본에서는 같은 단어로 번역되어서 눈에 띄죠. 그렇다면 어디서 사용되었을까요? 바로 고린도 교회에서 물을 흐리고 있는 거짓 교사들을 나타낼 때 쓰인 것이죠. 그들은 자천 타천 추천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지금 말로 말하면 이력서 같은 것이죠. 자신의 신분을 자랑하고 이력을 앞세워 영적 권위를 세우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는 그런 추천서가 없다는 것을 들어 비방했죠. 그때 이미 바울은 그런 추천서는 따로 필요 없음을 선언하기도 했는데요. 오늘 자신이 직접 자천이라는 말을 사용하죠. 자신도 이력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력은 앞서 말한 거짓 교사들의 이력과는 다릅니다. 바울이 내세운 자천이란 바로 말이 아니라 몸이었기 때문이죠. 앞선 그들은 입으로, 글로 자신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행동과 삶으로 자신을 증명했죠.

 

언젠가 이웃 사랑과 특별히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역을 잘하기로 유명한 교회의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대단한 일들을 이룬 존경스러운 교회였기에 그 목사님과의 대화에 기대가 많았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이룬 교회와 교인들에 대해 존경의 말을 건네자 목사님은 조금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셨죠. 겸손으로 들렸지만 이내 그 목사님에게서 깊은 고민이 느껴졌습니다. 그 고민이란, 교회가 그런 이웃 사랑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역을 하다 보니 교인들도 동참하는 것이 사실이나, 그들이 마음속 깊이 이웃을 이해하고 나와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이해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어요. 오히려 이 교회에 다니고 자신들이 내는 헌금으로 이런 사역을 하다 보니 그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소외된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돌보는 사람들로 착각하는 것 같다는 겁니다. 그들이 직접 행동하거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면서도 말이죠. 이 말씀에 저 또한 날카로운 화살이 가슴에 박히는 듯한 충격이 있었어요. 이런 질문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목사라고 하니까 진짜 내가 목사같이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일꾼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일합니다. 신앙은 생각이 아니라 삶으로 일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은 말도, 생각도 아닌 우리의 몸이 적는 것이죠. 믿음은 이상이 아닙니다. 현실이고 실제죠. 오늘 내가 사는 시간이 나의 믿음이고, 오늘 내가 하는 행동이 나의 신앙입니다. 찬양과 기도는 그 시간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이후, 나의 걸음걸이에서 증명되죠. 

 

우리의 믿음이 오늘 살아 숨 쉬었으면 합니다. 힘찬 생명력이 넘실대는 꿈틀거림으로 오늘을 채워갔으면 해요. 오늘도 믿음의 옷을 입고, 기대의 허리띠를 띠고, 감사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삶의 자리에서 뛰어다니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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