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묵상53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온전히 되기 위한 시작입니다.(요한복음12:44~50)

2020. 3. 13. 07:59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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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하시는 분인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를 설명하시죠. 그러시면서 당신은 우리에게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목적도 밝히시죠. 우리를 어둠 속에 머무르게 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라고요. 이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난을 당했다고 가정해 보죠. 깜깜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나침판도 없고,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조그마한 빛이 보여요.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이 그 빛이시라는 것이죠. 

이어지는 말씀은 ‘나는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배에게 한 줄기 등대 불빛은 길을 잃은 배에 대해 심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하려는 것이죠. 구원의 길은 그 빛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또다시 자신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신지를 밝히시는데요. 이렇게 말씀하시죠.

요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다시 말하면, 그 빛을 따라가는 사람은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 빛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길이죠. 문제는 우리가 그 빛을 따라가지 않을 때입니다. 연이어서 말씀하시죠. 심판하시는 분은 따로 있다고요. 이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구분하기 위한 말씀은 아닌 것 같아요. 어쩌면 그 빛을 따라가지 않으면 발생하는 우리의 현실을 말씀하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온전히 되기 위한 시작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끝이 아니죠. 시작입니다. ‘내가 잘할게’ ‘결심했어’라고 선언하는 것이 끝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 결심은 시작입니다. 이제 그 결심을 살아내야 하죠. 예수 믿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아마도 그 빛을 따라 걷는 길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수의 별빛을 쫒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중에 잃어버릴지도 모르고, 헤롯의 방해처럼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끝까지 붙들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신앙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출발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예수 믿었다고 모든 것의 결과가 한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지금 당장 무엇인가가 손에 잡히지도 않아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운동하겠다고 결심한다고 바로 근육맨이 되지 않듯이 말입니다. 이제 운동하는 하루하루를 살아내야죠. 그 삶이 지치고 힘들지도 모릅니다. 귀찮고 어려울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운동이 꼭 나에게 필요하다고요. 운동하지 않으면 반드시 건강을 잃는다고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놓치면 길을 잃는다고요.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사라지면 어떤 합리적인 논리가 우리 안에 있어도 우리의 영성은 흐려지고 깨어진다고요. 그래서 어려워도 말씀 붙들고, 힘겨워도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죠. 

오늘도 우리는 그 하루를 살아내야 합니다. 귀찮고 힘들고 쉬고 싶은 운동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하루가 나의 미래를 만듭니다. 나도 모르게 자라나는 근육처럼, 나도 모르게 채워지는 지혜로 나의 앞날을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죠. 빛을 잃으면 잘못된 결정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빛을 붙들면 더 빠른 길을 가게 되죠. 우리의 오늘 하루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빛을 바라보고 걷는 하루 말이죠. 그래도 오늘, 힘겹게 빛을 쫓는 우리에게 위로가 있었으면 합니다. 괜스레 근육이 더 생긴 것처럼 느껴지는 하루, 왠지 오늘은 성장한 인격으로 남들에게 넓은 가슴을 보여주는 대견함을 발견하는 하루, 그런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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