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9. 07:11ㆍ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나사로 사건을 통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반감은 극에 달았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계획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런 마음을 먹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그리 분노했을까요? 신성모독이요? 잘못된 가르침이요? 그보다 어쩌면 자신들의 밥그릇에 대한 도전인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질투죠. 우리는 경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가는 존재들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하셨죠? 그것은 우리가 서로 먼저 가려고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보듬으며 어깨동무하고 함께 가는 것을 의미하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본모습입니다. 거기에 비교, 질투, 시기, 상대적 박탈감이 끼면 우리의 오리지널 디자인은 일그러집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라 말씀하심에는 우리가 창조된 원모습 그래도 돌아가라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죠.
이런 비교와 질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비단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이들이 주님을 향해 환호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꽃길을 만들며 찬양했지요. 참고로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환호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구원자로 칭송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외침이 사실은 종교지도자들의 질투,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이를 바득바득 가는 그들과, 소리 높여 찬양하고, 경배하는 모습이 같다고요? 좀 이상하게 들리시죠? 이런 해석의 근거는 스가랴서의 예언을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이 모든 모습이 예언된 대로라는 것을 요한복음 저자는 말을 하면서 제자들은 당시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적고 있어요. 당연히 다른 이들도 알 수 없었겠죠. 그리고 그렇게 찬양하며 환호하던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아 한 입으로 다른 말을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이죠. 구원자라고 말하는 입에서 배신자라는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찬양의 소리는 저주의 소리로 바뀌죠. 왜 그럴까요?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고, 헤롯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로마를 박살 낼 예수님을 꿈꾸었을지도 모릅니다. 잘못된 종교지도자들을 다 쓸어버리고 예수님이 나라를 차지하여 해방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너무도 초라하게 붙잡히시고 고난 당하시죠.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당황은 금세 분노로 바뀌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이루어진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큰 찬양과 높은 엎드림이 있어도, 그것이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사업입니다. 남을 짓밟고 내가 올라서야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전쟁입니다. 그런 모습의 결과는 똑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습이나, 그렇게 찬양해 마지않던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질투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것이 시기와 경쟁의 결과들이죠.
신앙은 내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나를 얻는 것이에요. 집을 떠났던 아들이 돌아오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집에 있던 아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요. 그래서 주님이 꿈꾸시는 일이 나를 통해 실현되는 것, 그것이 나의 신앙이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를 통해 전해지는 것, 그것이 나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쟁으로 살지 마세요. 더불어 함께 사세요. 그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나의 모습입니다. 남이 경쟁하건 말건, 남이 시기하건 말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말건, 나는 사랑을 가지고만 사세요. 함께 더불어 사세요. 고난이 닥쳐도, 그래도 선한 일을 멈추지 마세요. 경쟁에서 진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진리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이 이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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