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4. 06:38ㆍ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오늘은 두 사람(정확히는 한 사람과 무리)이 대비되어 등장합니다. 하나는 경비병들이고, 다른 하나는 니고데모입니다. 경비병들이란 예수님을 잡기 위해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의 경비병들을 말하고요. 니고데모는 이미 3장에 등장했던 그 니고데모입니다. 이 둘은 공통점과 다른 점을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공통점이라면 한 편(?)이라는 것이죠. 결국 그들은 대제사장의 수하이거나 당시 권력자였던 바리새파 사람들 편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기득권자들인 셈이죠. 다른 점이라면 계층 정도죠. 니고데모는 고위층인 반면에 경비병들은 하위계층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당시 지도자들과 대립을 합니다. 경비병마저 예수님을 두둔하죠. “이처럼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라고 말이죠. 요즘 말로 하면 이런 것이겠죠?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없었다. 이 사람은 목수인가 메시아인가?” 이미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마저도 그들에게 말합니다. “적어도 이야기는 들어보고 심판을 해도 해야 할 것 아니오?” 소명 절차도 없이 확증편향을 가지고 단죄를 내려서는 안 된다는 반대의견을 내죠.
너무도 다른 경비병들과 니고데모가 같은 자리에 서서 권력자들과 대립하는 모습은 낯섭니다. 아마도 이들은 지식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율법을 아는 차이도 있을 테죠.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편에 섭니다. 반면, 율법에도 정통하고, 권력도 가진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죠.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마도 지식의 차이는 아닐 것 같습니다. 경비병들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니고데모도 등장하니까요. 그는 대제사장이나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율법이나 지식이 뒤떨어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와 권력의 차이도 아닐 테죠. 니고데모 또한 유대 관원으로서의 권력을 가진 자니까요. 그렇다면 뭘까요? 어쩌면 한 가지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경험했다는 것이죠. 그를 만났고, 그의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을 만난 적이 없죠. 이것은 물리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 군데서 부딪치고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과 머리에는 이미 자신들의 확고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듣기 시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의 첫 번째 반응이 바로 귀를 여는 것이라고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귀를 열죠. 감사하는 사람은 듣습니다.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죠. 곧잘 우리는 토론을 듣습니다. 그런데 토론이 토론이 아니라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자주 보죠. 이유가 뭘까요? 토론이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이야기만을 주장하기 위해 귀를 닫기 때문이죠. 무조건 상대방의 말은 틀렸다는 것을 전제해 버리면 그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꼬투리만 잡게 되죠.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은 뭐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확증편향을 가지고 귀를 닫는 것이 가장 큰 잘못입니다. 귀가 닫히면 어떤 이해도 불가합니다. 귀가 닫히면 어떤 공감도, 사랑도, 나눔도 할 수 없죠.
사랑하는 여러분, 나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귀를 기울여야죠. 어린아이들이 크는 것을 보면 뭘 그리 빨리 배우는지 놀랍죠. 말하는 것이 하루가 다르죠. 가만히 보면 이유가 있습니다. 고집부리고 투정 부리는 것은 한결같지만 그 아이들은 주변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듣고 따라 하죠. 다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흡수한다고 말할 정도로 귀를 열고 있기에 쉽게 말하고, 빨리 배우고, 쑥쑥 성장하는 것입니다. 들을 때는 나의 것을 잠시 꺼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셔야 해요. 그래야 그곳에서 앎이 일어나고, 배움이 일어나고 성장이 일어납니다. 그래야 그곳에서 다른 세계가 펼쳐지죠. 우리가 싸우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기고, 공격하고, 무시하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를 가슴을 열고 듣지 않기 때문에 나의 말도 힘을 잃는 거예요. 오늘은 누군가 말을 할 때 잠시 나의 생각은 꺼보세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마치 일생에 들을 수 없는 세계적 석학의 강의처럼 들어보세요. 그 대화는 아마도 놀라운 공감이 오고 가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사람을 얻게 될 거예요. 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의 지평 또한 넓어질 것입니다.
'묵상하는말씀 > 요한복음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서묵상34 -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하라” 요한복음8:39-47 (0) | 2020.02.20 |
---|---|
요한복음서묵상33 -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8:31-38 (0) | 2020.02.19 |
요한복음서묵상32 - 우리의 바른 ‘선택’이 오늘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요한복음8:21-30 (0) | 2020.02.18 |
요한복음서묵상31 -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읽는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8:12~20 (0) | 2020.02.17 |
요한복음서묵상30 - 사랑은 함께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7:53~8:11 (0) | 2020.02.15 |
요한복음서묵상28 - 주어서 행복한 사람이 되세요. 요한복음7:37-44 (0) | 2020.02.13 |
요한복음서묵상27 - 우리가 지금까지 안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요한복음7:25-36 (0) | 2020.02.12 |
요한복음서묵상26 - 다름과 좋은 대화를 나누세요. 요한복음7:14-24 (0) | 2020.02.11 |
요한복음서묵상25 - 우리에게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제자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7:1-13 (0) | 2020.02.10 |
요한복음서묵상24 - 믿음은 하나님께서 백지에 그림을 그리실 수 있도록 나를 깨끗하게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6:60~71 (0) | 2020.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