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묵상30 - 사랑은 함께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7:53~8:11

2020. 2. 15. 07:09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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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도 유명한 본문이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또 다른 일을 하나 꾸몄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온 것이죠.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인은 성 밖으로 쫓겨나 돌에 맞아 죽어도 상관없는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 특별히 어린이와 여인들에 대한 깊은 배려들을 해 왔기 때문에 저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보자 싶었을 테죠. 여인에 편에 서면 율법을 어겼다고 할 것이고,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 잔인하다고 말했을 것이 뻔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땅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내용도 모릅니다. 알려고 힘쓸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이었다면 기록되었을 테죠. 괜한 일에 우리가 힘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는 장면은 구약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죠. 바로 다니엘서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왕 벨사살은 왕궁에서 잔치를 벌이며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술잔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잔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이렇게 글씨를 쓰죠. “메네 메네 테켈 파르신” 이것을 다니엘이 풀이해 줍니다. 그 뜻은 바빌로니아의 멸망에 대한 예언인데요. 자신의 권력과 권리를 믿고 교만해진 왕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였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 여인의 수치와 모욕은 아랑곳하지 않는, 심지어 그녀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하듯 장난하는 저들의 교만을 보여주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시죠.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에 찔린 이들은 저마다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지혜를 화두 삼기도 하고, 대적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능력에 대해 논하기도 하는데요. 저는 그런 식에 묵상에는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우리의 지혜 위에 계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들의 지혜와 비교해서 칭찬받으실 그런 군번이 아니시라는 말이죠. 간혹 주님에 대한 우리의 대접이 오히려 그분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런 칭송이 그런 류에 속할지도 모르죠. 오히려 저는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서글프셨을 것 같아 보여서 마음이 짠합니다.

제가 한 묵상은 이렇습니다. 두 가지 의문에서 묵상은 출발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물러가는 장면입니다. 그때 요한복음 저자는 ‘나이가 많은 이들부터 하나씩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제가 의문을 품은 것은 나이가 아닙니다. ‘나이 많은 이들’이라고 말한 이들이 그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그 자들을 말하는 것일까? 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입니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이 말씀이 너를 괴롭히는 자들이 이제 없느냐?라고 물으신 것 같으신가요? 저는 왠지 이 구절이 서글프게 들립니다. 마치 반대로 ‘너를 옹호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느냐?’라고 물으시는 것 같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의문에 대한 시작은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일어난 상황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장소는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시자 많은 이들이 예수님 앞에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음한 여인이 끌려왔을 때 그곳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이 같이 있었던 것이죠. 문제는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놓이고, 바리새인들이 그녀를 정죄할 때, 예수님을 따르던, 혹은 그의 가르침을 받던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혹시 그들도 그녀 앞에서는 돌을 들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나이 많은 사람부터라는 말의 뜻은 그들을 말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요? 저 같으면 낙심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따라고, 자신의 가르침을 받던 이들이 이 상황에서 같이 돌을 드는 것을 보았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생명존중을 말하고, 죄인을 구하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기까지 한 그 은혜와 사랑을 선포하는데 전통적인 율법의 상황에서 그 은혜와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정죄만을 일삼는 모습을 보았다면 어떨까요? 그 누구 하나 여인을 감싸거나 위로하거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다니고, 그렇게 사랑을 외쳤는데, 여전히 세상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신다면 말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을 거꾸로 하면 어떤 말씀이 될까요? “너희도 다 똑같은 죄인이다. 그러니 함께 용서하며 살아라” 이런 말이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주님이 너희를 용서해 준 것같이 너희도 서로를 용서하며 살아라” 그리스도인들은 손에 들었던 돌을 버리고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나이 많은 사람부터, 그 여인의 곁에 남아 용서의 손을 내밀고 일으켜 주어야 했는지도 몰라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그치는데서 끝나는 것이 사랑은 아니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돌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자리에 남아 손을 내밀고 일으켜 주는 사람입니다. 그 여인이 돌에 맞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녀가 살아도 어디서 살겠습니까? 목숨이 붙어 있어도 이웃이 없는 삶, 손가락질받는 삶이라면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용서와 긍휼은 같이 모욕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바람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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