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3. 06:45ㆍ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 가운데 대표적인 이적의 말씀이죠. 워낙 유명한 본문이라 굳이 내용을 설명드리지 않아도 아실 줄 믿습니다. 다만 저는 오늘 이 본문에서 지금껏 읽어왔던 내용과는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행간에는 왠지 복선이 많이 깔려 있는 듯 느껴집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호수지만 유대 사람들은 호수와 바다를 섞어서 불렀습니다) 반대편으로 가셨습니다. 유독 반대편으로 가셨다고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큰 무리들이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그들이 모인 이유를,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기 때문이라고 친절히 설명하죠. 이를 이해하려면 다른 본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 이적에 대한 기록은 복음서 4곳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갈릴리 바다 반대편을 외딴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외딴곳에 병자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게다가 그곳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먹을 것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지금 예수님은 그 시대 지배층과는 너무도 다른 소외되고 아파하고 배고픈 이들의 자리에 계신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북한과 관련된 사역을 하고 있을 당시, 북한과 깊은 관계에 있는 재미동포 남매 분과 함께 사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분은 북한 최고 수뇌부와 독대를 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분이셨고, 그 동생은 MIT 지질학 박사로 북한의 자원 개발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분이셨어요. 그런데 두 분을 만나면 극명히 갈라지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북한의 경제적인 상황이었어요. 주로 평양을 중심으로 교류를 하는 누님은 북한 경제 사정에 대해 낙관적인 반면에, 자원개발을 위해 북한의 각지를 다니는 동생은 절망적이었죠. 그래서 함께 만나면 늘 그 부분 때문에 의견이 갈리곤 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양쪽의 이야기를 다 전해 들을 수 있었죠. 예수님 당시 유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지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극명한 양극화는 식민지배를 받지 않아도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 로마에 붙어사는 권력자들에 비해 낮고 천한 일반인들의 삶은 극히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병자들은 성문 밖으로 버려지고, 가난한 이들은 착취를 당했습니다. 누군가는 배부르게 먹을 때, 누군가는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식량으로만은 전 세계 인구를 먹이고도 남을 1.5배의 생산량을 가지고도 어느 곳은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걱정해야 할 만큼 남아돌고, 어느 곳은 하루 한 끼조차 취할 길 없어 굶어 죽어가는 현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양극화 현장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먹을 것에 대한 이슈를 던지십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말하죠.
“이들을 먹이려면 은화 이백 개로도 모자랍니다.”
“뭐가 있긴 한데 이걸로 누구 코에 붙입니까?”
이 말들은 세상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합니다.
“나 한 사람 돕는다고 무슨 변화가 있겠어?”
“세상은 변하지 않아.. 아니 변화시킬 수 없어.. 너무 큰 일이거든”
이런 세상의 논리에 예수님은 반기를 드셨습니다. 누구도 감히 뛰어들지 못하는,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일의 중심에 서시죠. 그리고 그 작은 물고기 두 마리, 빵 다섯 개를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고, 이 부족한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작아도 나눔에는 배가 되는 역사가 있고, 사랑에는 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권력이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공평과 공의는 오직 작은 자들의 나눔을 통해서라는 혁명적인 진리를 오늘 이 자리에서 보여주시죠. 어쩌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가치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우리는 반대에 부딪칩니다. 그것이 가능하냐고 말이죠. 너 혼자 한다고 되냐고 말입니다. 괜한 수고 한다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그 반대 때문에 나의 작은 나눔은 기적의 자리로 가지 못합니다. 그 앞에서 낙담하며 세상의 논리에 수긍해 버리는지도 몰라요. 혹시 오늘 아침에도 그러지 않으셨나요? “감사노트 쓴다고 뭐가 달라질까?” “오늘 하루 빠진다고 뭐 문제 될까?”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논리가 맞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게 맞는데 나는 조금 시늉하고 사는 것처럼 사는지도 몰라요.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틀렸고 예수가 맞습니다. 세상이란 없습니다. 단지 내 작은 움직임으로 만들어질 뿐입니다. 갑작스러운 성장은 없습니다. 아무리 큰 존재여도, 작은 걸음부터 시작합니다. 그 작은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리입니다. 오늘 하루가 그 작은 기적의 시작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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