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묵상15 - 기적과 감동은 예수님을 아는 입구일 뿐입니다. 요한복음4:43~54

2020. 1. 29. 06:52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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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행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오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갈릴리에 도착했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알아볼 뿐만 아니라 환영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를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죠.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던 이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고 그를 칭송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서 2:23을 보면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 2:23,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여러 표징을 보여 주셨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우러러본 것이죠. 이를 두고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도착하셨을 때, 갈릴리 사람들이 그분을 반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유월절 기간 동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지, 그분이 누구시며 장차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 정말로 알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는 지금까지 요한복음이 계속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메시지와 연결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도, 모두 예수님보다 이적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이죠. 그리고 요한복음은 이를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것이 가버나움의 기적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번창했던 도시로, 주로 고관들과 세리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던 모양입니다. 이곳에 왕의 신하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의 아들이 죽을 지경에 놓였기 때문이죠. 이 역시도 요한복음 저자는 필요에 따라 주님을 찾는 사람들 중 하나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저 의사쯤으로 예수님을 취급하는 것이죠. 이에 예수님은 다시 한번 어떤 겉모습의 형식,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우리에게 일침을 가하십니다. 

“기적을 보고 압도되지 않으면 너희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의 아들을 고쳐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어떤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기적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씀하고 계시죠. 예수님은 그 왕의 신하를 따라가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고치시죠. 이 장면은 예수님의 다른 이적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한센병 환자를 고치시던 그 장면 말입니다. 열 명의 한센병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시죠. 그들은 그렇게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린 사람은 그 열 명 중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을 누가복음의 저자는 기록하고 있죠. 누가복음의 저자가 정말 기록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장면입니다. 나음을 입은 자들의 다음 행적 말이죠. 요한복음의 저자 또한 그와 같은 기록을 담습니다. 어쩌면 이전의 사람들과 달리 예수께서 말씀으로 고치시고, 생명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은혜받기를 원하고, 기적이 임하기를 원하죠.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편안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늘 도우심을 입는 일들이 벌어지길 바라죠. 때론 큰 감동의 자리에 서길 원하고, 넘치는 기적의 순간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순간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입구일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감사의 의미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이 있습니다. 은혜도 주시고, 때론 기적과 같이 낫게 하시고, 세워주시고, 합격도 하게 하시고, 잘 풀리게도 하시죠.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가 감사의 사람으로 들어오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무속신앙과 기독교가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기 변화입니다. 무속신앙은 자기 변화가 없습니다. 늘 기적이 일어나야 하고, 늘 감사한 일이 상황적으로 벌어져야 하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자기 변화로 상황을 만듭니다. 매 순간이 기적이 되게 만들고, 범사를 감사로 만드는 것은 자기 변화의 결과입니다. 그 기적은 자기 변화의 시작인 것이죠. 오늘 본문의 왕의 신하는 자기 변화를 시작했습니다. 자기 변화 없이는 기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기 변화 없이 감사노트는 오래가지 못해요. 감사할 상황을 찾지 마세요. 감사하고 있는 나를 만드셔야 합니다. 내가 감사할 때 진정한 감사가 됩니다. 이제 문을 여세요. 그 문 앞에 머물지 마시고, 주님을 아는, 주님을 믿는 믿음 안으로 들어오세요. 나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세요. 그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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