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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서묵상 74 -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질문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29:20-32

구약성경에는 동명이인이 많습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죠. 그래서 조금 헛갈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짓된 세 명의 예언자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이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골라야의 아들 아합,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 그리고 느헬람 사람 스마야입니다. 아합하면 엘리야 시대 폭군이었던 아합이 떠오르시죠? 물론 오늘 등장하는 인물은 그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시드기야도 그렇습니다. 본문의 시대가 시드기야 왕 시대인데요. 그는 요시야의 아들이고 남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드기야는 마아세야의 아들이고요. 그는 당시 예언자로 활동했던 모양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폭군 아합왕 시대에도 시드기야라는 이름을 가진 예언자가 있었어요. 그나아나의 아들이었던 시드기야는 당시 아합왕에게 잘못된 예언을 해서 미가야 선지자로부터 거짓 선지자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죠. 아무튼 서로 다른 인물들입니다. 스마야라는 이름은 더 심합니다. 구약에 도처에 등장하는데 대충 20번이 넘는 것 같아요. 다 다른 인물들이죠. 

소위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역하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죠. 어찌 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구약의 예언자들을 오늘날 목회자들로 보는 분들이 계신대요. 어찌 보면 직무가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목회자보다는 그리스도인과 비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자들, 그리스도를 고백한 이들이 곧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이자 중보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그분의 생각과 뜻이 전달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이는 곧 우리들도 주님의 책망 앞에 놓일 수 있다는 말인데요. 어떤 모습일 때 책망을 받지는 살펴보는 것은 곧 우리가 반면교사로 사용할 좋은 예가 될지도 모릅니다.

첫 번째로, 아합과 시드기야의 죄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자기 이웃의 아내들과 간음을 했다고 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거짓말을 하였다는 것이죠.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이웃의 아내들을 유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하나님의 원치 않는 거짓말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파는 행위, 거짓 은혜와 고백을 하는 행위들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할 때가 우리 안에 있죠. 오랜 신앙생활을 했지만 말씀 한번 제대로 읽어본 적 없고, 매일 기도하며 지내지도 않으면서 마치 은혜 있는 척, 믿음 있는 척할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라고 거룩한 척, 직분자라고 믿음 있는 척할 때가 많아요.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훈계하고, 마치 자신이 옳은 것처럼 주장하고 의견을 피력할 때가 많죠. 어쩌면 이런 일들이 아합이나 시드기야 같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간음까지는 아니어도 남의 영성을 해치는 일은 같을지 몰라요.

스마야의 죄는 이렇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대적하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레미야의 책망과 비수 같은 말씀이 싫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레미야를 가두고 말하지 못하게 요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레미야를 싫어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스마야와 같은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골수를 쪼개는 것을 싫어하죠. 그저 단순히 위로와 편안한 말들을 듣기 원합니다. 잘한다고 말해주고, 그만하면 됐다는 말을 듣기 원하죠. 그저 축복, 그저 은혜, 그저 최고라는 소리를 듣길 원합니다. 조금이라도 지적하는 것, 영적 성장을 추구하는 말들은 듣기 싫어하죠. 말씀 읽어라, 기도하라, 사회적 책임감과 정의, 공정, 공의, 나눔, 평등과 같은 단어들을 싫어합니다. 오직 나만 잘되기를, 하는 일마다 성공하기를 빕니다. 스마야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의 첫 설교가 등장합니다. 그의 설교 앞에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세요?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얻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질문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 놓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분의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질문하며 사는 사람들이죠. 말씀을 평가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에 찔림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고, 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 목적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믿음입니다. 오늘도 말씀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는 우리이길 빕니다. 말씀 앞에서 나를 쳐 성장의 길을 걷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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