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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서묵상 73 - 기쁨과 슬픔, 아픔과 위로는 하나입니다. 예레미야 29:11-19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전제가 필요합니다. 바로 이 대목이죠. 하나님의 계획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죠. 당연합니다. 누군가를 친구로 두려고 할 때도 우리는 이 믿음이 필요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자 할 때도 이 믿음이 있어야 하죠. 어디 저 사람이 나를 해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열고 도움을 받거나 곁에 친구로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만남에는 이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굳이 이 말씀을 선포하시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우리들 안에 의심과 의아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이것이 재앙인지 번영인지,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고달프고 힘든 일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죠. 이쯤 되면 우리는 ‘과연 이것이 나를 위한 일인가?’라고 불평하기 시작하죠. 딸아이가 어릴 적에 친구들하고 서로 논쟁을 한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누구 엄마가 더 큰 마녀냐는 논쟁이었습니다. 서로 우리 엄마가 심한 마녀라느니, 우리 엄마는 서쪽 마녀라느니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아마도 엄마의 잔소리, 자녀에 대한 규제가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졌겠죠. 사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규제나 억압이 아니라 가르침인데도 말이죠.

‘정반합’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헤겔의 변증법을 도식화한 철학적 용어인데요. 서로 상반된 ‘정’과 ‘반’이 갈등을 하면서 ‘정’과 ‘반’은 어느덧 사라지고 ‘합’이 만들어진다는 논리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방식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한 가지로만 이루어지지 않아요. 갑자기 공부의 불이 붙은 아이가 있다고 쳐보죠. 그 아이는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한다고 해도 반드시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365일을 공부할 수 없죠. 근육을 키우는데도 자극을 주었다가 쉼을 주었다가를 반복해야 키워집니다. 운동만 주야장천 한다고 근육이 키워지지 않죠. 산을 오르는 길이 있으면 내려오는 길도 있습니다. 슬픔이 있으면 기쁨도 있고, 아픔이 있으면 위로도 있습니다. 불편함을 알아야 편안함이 무엇인지 알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쉼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죠. 모든 것이 다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입니다. 편안함만으로 편안함을 맛볼 수 없고, 기쁨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깊은 슬픔을 통과할 줄 알아야 깊은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역경을 즐길 줄 알아야 편안함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죠. 하나님의 계획에는 이 모든 것이 있습니다. 광야를 거쳐야 가나안이 있고, 이 땅의 삶을 통해 하늘나라의 소망이 생기는 법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아픔도 나에게 번영을 주는 길이고, 슬픔도 나를 번영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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