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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서묵상 72 - 피하지말고 즐기십시오. 예레미야 29:1-10

아침부터 비속어를 사용해 죄송합니다만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사람에게는 평생 써야 할 지랄의 총량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마다 그 지랄이 발현되는 시기가 다 달라서 서로 비교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죽기 전까진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어릴 적에 속을 썩이는 것을 너무 힘겨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부려야 할 지랄을 부리는 것이니까요. 차라리 일찍 그 모든 양을 털고 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엄친아’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착한 아들이어도 결국 잠시 미루어질 뿐 지랄의 총량은 언젠가 발현될 테니까요. 이 말은 경북대 김두식 교수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편지 형식으로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포로들에게 전해지죠.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5절,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라면, 곧 해방이 올 것이라거나 고난을 이겨내라거나, 혹은 저항과 투쟁의 메시지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지금 이들은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된 이들이니까요. 그런데 메시지는 그 이국땅에서 순응하고 살라는 메시지라서 당혹스럽습니다. 마치 세상에 보내진 우리에게 세상에 순응하고 살라는 의미처럼 보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시민인 우리들을 이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문화들과 척을 지며 살게 하시지 않았어요. 우리는 이 땅에서 집을 짓고, 열매를 따 먹으며 살죠. 아들딸도 낳고 삽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처음 언급한 지랄 총량의 법칙을 생각하면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지랄이 발현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것이죠. 지랄의 총량이 없는 인생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랄이 없는 인생을 꿈꿀 것이 아니라 지랄을 잘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꿔야 하겠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포로의 시기를 주셨습니다. 왜 그런 고난을 주셨을까요? 이는 말 안 듣는 이스라엘을 말 잘 듣는 민족으로 만들기 위한 벌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라는 뜻이죠. 주어지는 어떤 상황도 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 목적이라고요.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센 파도를 즐깁니다. 거기서 해보지 않은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희열을 느끼죠. 우리의 기쁨은 피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즐겨서 오는 것입니다. 즐거운 시간도, 고난의 시간도, 즐기는 사람에게 가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사실 기쁨조차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예배의 시간이 주어졌다고 다 예배의 시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임한다고 다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에요. 즐기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때론 우리에게 힘에 부치는 시간도 있어요. 그런 시간은 피하고 싶죠. 늘 평탄한 대로이길 바라죠. 그러나 우리에게 대로만 주어진다고 해도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지는 못해요. 고속도로를 만들 때 처음부터 끝까지 똑바른 길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만들 수 없어서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 만드는 겁니다. 고속도로가 일직선으로 만들어지면 운전이 편안하고 좋을 것 같으시죠? 오히려 위험하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루하고 졸리거든요. 그래서 고속도로를 계획하는 이들은 적당한 커브와 롤링을 만듭니다. 피한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피한다고 피할 수도 없어요. 오히려 즐기세요. 일찍 털고 갈 것은 일찍 털고 가세요. 피하고 미루면 기간만 늘어날 뿐입니다. 치러야 할 것은 치르세요. 통과해야 할 것은 통과하고요. 그렇게 마주 오는 것들은 피하지 말고 즐기세요.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곳을 하늘나라로 만드세요. 이것이 진정한 인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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