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묵상51 -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바뀝니다. 사사기 16:1~3

2019. 9. 12. 06:38묵상하는말씀/사사기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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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짧습니다.
그런데 짧은 본문이지만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지죠.
그것도 다 이해하기 힘든 일들입니다.
첫 번째, 그가 창녀를 만났다는 점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삼손은 구별된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의 삶은 거룩을 유지하는데 서원한 삶이죠.
그래서 술도 마시지 않았고, 시체도 만지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창녀라니요?
그러고 보니 삼손은 주색잡기에 능한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주색잡기란, 술과 여자와 노름 등을 일컫는 말인데요.
이미 술에 취한 흔적과 여인에 눈먼 경험이 있죠.
게다가 수수께끼 같은 내기를 하는 것을 보면 노름일 수도 있겠어요.
수많은 이들을 죽였으니 시체도 수없이 만졌을 테고요.
아무튼 나실인의 삶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두 번째는 하필 가도 왜 가사에 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사는 블레셋의 5개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중에서도 삼손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먼 곳에 속하죠.
방금까지 나귀 뼈로 천 명에 이르는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는데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셈이죠.
나귀 뼈 사건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겠습니까?
아마도 삼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을 것 같아요.
그런데 가사에 가서, 그것도 창녀를 만나 늘어지게 놀다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그의 힘자랑입니다.
삼손이 가사에 왔다는 사실은 금방 소문이 났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죠.
또한 블레셋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겠죠.
그를 자는 동안 잡을 요량으로 매복해 있었던 것 같아요.
성경은 이 상황을 상세히 적고 있지 않아서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매복 작전은 실패했던 모양입니다.
삼손은 자신들 잡으려는 블레셋 사람들을 뒤로하고 보란 듯이 그 가사 성읍의 문짝과 기둥을 뽑아버렸습니다.
고대 성읍들은 주로 성벽을 쌓아 자신들의 터전을 구별했습니다.
그래서 성문은 성읍의 대표적인 입구이자, 보호의 첨병 역할을 하죠.
그런데 그것을 부숴버렸다는 이야기죠.
뭐, 여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자신을 잡으려는 이들에게 자신의 힘자랑을 함으로 얼씬도 못하게 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그 성문과 기둥을 어깨에 지고 헤브론까지 갔다는 거죠.
헤브론은 유다 지파의 중심지입니다.

일단 이 거리가 엄청 멀어요.
어림잡아 6~70km는 족히 되는 거리죠.
그 거리를 갔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왜 갔을까도 의문이에요.
굳이 그랬어야 했을까 싶기 때문인데요.
제가 추측하기로는 삼손의 뒤끝이 아닐까 싶어요.
어제도 묵상했지만 삼손은 혼자 외로운 싸움을 했죠.
자신의 편은 뒷짐 지고 저 멀리에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묶어 내어 주고 죽기를 바라며 쳐다보았죠.
어쩌면 그들에게 보란 듯 암묵적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아무튼 삼손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죠.
이미 말씀드렸던 그의 욱하는 포인트를 맞출 수 없네요.
그렇다면 왜 그리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을까요?
삼손의 문제는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국한해 살펴보자면 한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1절의 내용입니다.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창녀를 하나 만나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새 번역에는 창녀를 ‘만났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개역개정 번역본에서는 기생을 ‘보았다’라고 적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삼손이 등장할 때도 이 ‘보았다’라는 말이 있네요.
삿 14: 1    삼손이 딤나로 내려갔다가, 딤나에 있는 어떤 블레셋 처녀를 보았다.
더 올라가면 창세기 하와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았다’고 되어 있죠.

이것을 소위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죠.
물론 ‘보았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소통하고, 누구와 눈이 맞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요.
창세기 하와가 하나님과 마주 하느냐, 뱀과 마주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졌듯이 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추석 연휴입니다.
먼저 여러분과 가정에 풍성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고 가는 길, 주님의 보호하심이 있기를 빌고요.

아마도 많은 가족들을 만나실 것입니다.
만남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만남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그 만남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만남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동기의 만남이 있어야 하죠.
만남을 구별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누구를 만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만나든지 내 욕심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사역으로 만나는 만남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득이 되는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세워진 가족으로 만나세요.
나를 이해해 줄 친구가 아니라 나를 신앙으로 이끌 친구를 만나시고요.
나를 섬겨줄 동료보다 내가 섬길 동료를 만나세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고, 
누구와 소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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