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묵상49 - 십자가는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입니다. 사사기 15:9~13

2019. 9. 10. 07:18묵상하는말씀/사사기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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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의 이야기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마지막 장면, 블레셋 신전을 무너뜨리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16장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도 삼손과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들이 있죠.
들릴라와의 연분이 그렇고요.
어제 본문의 여우 300마리로 불을 지르는 장면도 그렇죠.
오늘부터 나오는 15장의 이야기도 아주 유명합니다.
당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는 사건이죠.
천 명이 죽어가는데 마치 게임 중계하듯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그래도 어릴 적 삼손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었어요.

오늘 본문은 그 시작입니다.
자신들의 곡식터가 모두 불탄 것에 화가 난 블레셋 사람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몰려 오죠.
그들이 몰려온 곳이 하필 레히 땅이었습니다.
레히는 턱뼈라는 뜻의 이름이죠.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에 겁을 먹은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붙잡아 내주게 됩니다.
마치 기드온 때와 유사한 상황이 연출되는 거죠.
이를 두고 순순히 삼손은 결박당해 끌려갑니다.

이 내용을 보면, 모든 일들이 블레셋을 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맞물려 있는 것 같아요.
삼손이 블레셋 여인에게 반해서 결혼식을 올릴 때도 결국은 블레셋을 공격하는 기회가 되었고요.
이유를 불문하고 다시 블레셋 처갓집을 찾아간 일도 결국은 블레셋을 곤경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 본문도 결국 블레셋을 물리치는 결과를 가져오겠죠.
이런 의미로 보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죠.

그런데 저는 이런 해석에만 묶여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죠.
그것이 우리의 불의여도, 혹은 우리의 죄일지라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심지어 주님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러도,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의 선한 행동의 변곡점으로 삼으시죠.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불의를 보고만 계시지 않으시니까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불의가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무뎌지는 경우가 이런 해석에 기반하죠.
“내가 문제 많아도, 그래도 하나님은 용서하실 거야”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또한 이 말씀이 결코 틀리지 않은 말씀임은 확실합니다.
그런데요.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문제가 많은 나를 고치는 일은 우리의 일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사사기의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기 위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사를 통해 악함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하시죠.
그렇다고 그 구원의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일부러 악하게 만드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주님 앞에서 악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죠.

제 말씀이 이해되실지 모르겠네요.
쉽게 설명이 오늘 잘 안 되네요.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것과 나를 돌아보는 일은 별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멈추면 언제나 사사시대처럼 반복되는 죄에 빠질 수 있다는 말씀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가슴이 아픕니다.

이스라엘은 싸울 생각이 없어요.
우리로 말하면 자신을 바꿀 생각이 없어요.
다만 삼손을 재물로 그저 안정된 생활을 꿈꾸죠.
마치 거짓된 제사, 일주일 한번 예배(그것을 재물로) 드리는 것으로 퉁치려고 합니다.
삼손이 어떤 마음으로 그랬건 간에, 블레셋에 저항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는데요.
그것도 한 번도 블레셋에 도전하는 이들을 보지 못했고,
더군다나 블레셋을 곤경에 빠뜨리는 통쾌함을 본 적이 없었던 그들이죠.
삼손 하나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일제 강점기에 어디선가 독립군이 일본군을 이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요?
‘나도 싸워야지’ 싶을까요?
아니면 ‘제네 왜 저러냐? 우리만 힘들게?’ 그랬을까요?
아무튼 유다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이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되새기면 어떨까요?
나에게 계속되는 싸인이 있습니다.
이렇게 대충 살면 안 된다고, 세상에 한 발, 십자가에 한 발 올려놓고 살면 안 된다고,
여러 생활 가운데, 여러 삶 가운데 싸인이 있어요.
그런데 그 싸인을 자꾸 무시합니다.
옆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요.
어떤 이는 말씀 묵상에 깊은 경험을 같이 하자고 말하기도 해요.
어떤 이들은 목장의 나눔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요.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그저 먼 나라 이야기로 듣고,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듣죠.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한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기도 하고요.
그냥 ‘나는 지금처럼 살래!’ 하며 거리를 두기도 하죠.
어쩌면 오늘 본문의 유다 사람들이 딱 우리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주님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교회에 걸린 십자가가 아니라 내 심장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나오고요.
그래서 십자가는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나의 구원의 문을 여셨어요.
그러나 그 문을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재물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산 제사가 구원을 부릅니다.
누군가 준비한 예배가 아니라 내 몸을 드리는 영적 예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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