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묵상54 - 잔잔한 부르심에 응답하세요.

2019. 3. 30. 07:22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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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8:15-22

 

히브리어에 [나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날아다니는 곤충 나비와 발음이 같지만 그것은 아니고요.
예언자, 혹은 선지자와 같은 뜻의 단어입니다.
한자로는 예언자(預言者), 선지자(先知者)라고 쓰죠.
언젠가 예언(預言)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예언(豫言)과는 다르다고 말씀드린 바 있죠.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의미는,
미래를 보고 말하는 것이지만
히브리어 [나비]는 ‘말을 맡는다’는 뜻이 더 강합니다.
은행에 돈을 맡기는 예금(預金)과 같은 개념인 거죠.
이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학자들은 [프로페테스]라는 단어로 번역했는데요.
얼추 짐작하시겠지만 이 단어가 영어로 프로패서(교수)라는 뜻으로 진화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교수란, 학생보다 더 깊은 지식을 알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죠.
예언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없는 미래를 추측하거나 무슨 초능력을 발휘해서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마음, 생각들을 받아 전하는 역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예언자를 세우실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언자를 세워주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사로잡힌 우리는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영이 없이는 그분의 생각을 알지 못하죠.
죄인 된 몸으로는 그분을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마치 운전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차의 핸들을 잡는 것조차 무섭듯이 말이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운전을 배우고 아는 사람은 쉽죠.
아니 어떤 사람은 운전을 즐기기도 합니다.

불이 무섭듯이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생각의 기초가 다른 사람들의 대화는 어렵고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서로의 공감을 이루기 힘들죠.
그래서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교수가 그렇지 않습니까?
어려운 책, 어려운 논리를 나의 눈에 맞게 가르쳐주는
그 역할이 교수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도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주위에 먼저 믿은 사람을 두신 이유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고,
모두가 다 나를 향해 보내주신 예언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주님께로 인도함을 받죠.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친구들 사이에서도 잘 나가던 친구가 있었답니다.
그 친구에게 예수를 전하고, 그분의 생각을 전했데요.
그런데 그때마다 조롱을 당했답니다.
자신의 재능으로 잘 나가던 친구였기 때문이죠.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났는데요.
그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연약해 있었답니다.
병상에 누워 목사 친구를 맞이한 그는
제일 먼저 이렇게 말하더래요.
“왜 내가 그때, 네 말을 듣지 않았을까? 그것이 인생에서 제일 후회되는 일이야!”

우리 주위에 나를 위한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보내신 예언자들 말이죠.
가족들이 그렇고, 교회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가장 편한 음성으로, 가장 가깝고 익숙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어보세요.
쉽게 지나치고, 쉽게 생각해서 넘겨버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예언자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너무 익숙해서 놓쳐버리고,
너무 편해서 무시하지 마세요.

번개가 치고, 큰 소리를 내며 무섭게 다가오는 말씀보다
잔잔하며 부드럽고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곁에서 속삭이는 음성에 귀를 여세요.
최후에 내가 감당하기 힘든 불같은 음성에 놀라지 말고,
지금 내 곁에 보내신 작은 음성들에 귀를 기울이세요.
잔잔한 부르심에 응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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