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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야고보서묵상

겸손, 그 경건의 열쇠 3

[흠없는경건5] 겸손, 그 경건의 열쇠 3

야고보서4:1~12,

1  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4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고 말합니다.

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9  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11 형제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 그대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12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한 분이십니다. 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1.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나그네가 급히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한참을 가다가 지쳐 자리에 주저앉아있는데 마차가 지나갔다.

마부에게 태워달라고 부탁하니 마부가 기꺼이 태워주었다.

나그네는 마부에게 물었다.

“예루살렘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마부가 말했다.

“이런 속도로라면 한 30분은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나그네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피곤함에 잠이 들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잠에서 깬 나그네는 마부에게 다시 물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습니까?”

“예루살렘요? 이 속도라면 한 시간쯤 걸릴텐데요?”

“네? 아까 30분전에 30분 거리라고 하셨잖아요?”

“네. 맞습니다. 아까 30분전에는 30분 거리였죠. 이 마차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중인데요?”


2.

야구경기에서 공을 던지는 투수를 평가하는 기본적은 기준은 구속이다.

기본적으로 볼이 빨라야 좋은 투수로 인정받는다.

우리나라에도 종종 시속 160km를 던지는 투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선수들이 성공하지 못했다.

왜?

볼은 빠른데 스트라이크에 던지질 못해서 그렇다...


3.

속도는 중요하다.

그런데 속도는 혼자의 힘으로 빛을 발하지 못한다.

속도가 빛나려면 방향이 맞아야 한다.


4.

잘 알려진 ‘죄’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하마르티아”이다.

이 단어의 뜻은 “과녁을 빗나가다”는 의미다.

아무리 화살의 속도가 빨라도 과녁을 빗나가면 화살의 의미는 없다.

제아무리 빠른 성공의 삶을 살아도 목적을 벗어난 삶은 ‘죄’라는 뜻이다.

인생의 길 끝에서 “여기가 아니었네?”라고 후회한다면 어떻겠는가?


5.

요즘, 대학들이 학과 통폐합으로 몸살을 겪고 있다.

통폐합의 중요 요지는 먹고사는 방법에 맞는 학과만을 키우려는 것이다.

대학이 취업률과 관련된 정부의 통계에 의해 정원이 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이나 기초학문은 차별을 받는다.

학생들은 ‘왜 베토벤을 알아야 하고, 왜 골치 아프게 생각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속도의 중요성 때문에 목적의 중요성은 잊는 것이다.

아니 목적이 곧 속도가 되어버린 형국이다.


6.

잘 알겠지만 처음 철학을 배우면 스스로 질문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본질에 관한 질문인데 우리의 삶의 출발은 이 질문에서 나온다.

이 질문은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있어서 신학과 인문학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주로 심리학이나 인문학에서는 이 문제를 이렇게 다룬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인가?”

그런데 신학에 있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 이전에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를 묻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위의 야구선수의 예로 표현하면, “나는 얼마나 빨리 던질 수 있는가?”와 “내가 던진 공은 어디로 가는가?”의 차이인 셈이다.


7.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피조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존재라는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첫 열쇠는 “나는 피조물이다”라는 고백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위치에 관한 분명한 표현이다.


8.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빌2: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9.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신 마음은 “나는 누구인가?”였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으나, 하나님이 아니며,

그분의 사랑을 받으나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가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겸손의 신학적 정의다.

겸손은 그저 손을 다소곳이 앞으로 모으거나 자주 사양하는 모습이나,

굽실거리고, 말을 적게 하며, 맨 끝 자리에 앉는 정도가 아니다.

겸손이란 ‘예의’에 대한 문제이기 이전에 ‘위치’에 대한 문제다.


10.

오늘 본문 12절에 야고보는 똑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약4:12,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11.

“너는 누구냐?”라는 이 질문에는 “네가 하나님이냐?”라는 질문이 깔려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욕망 앞에 놓인다.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아래서 인간이 놓였던 욕망처럼 말이다.

그 욕망은 모든 일에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

어느 때는 세상을 경험한 내가 하나님보다 높다.

어느 때는 종교적 율법을 익힌 내가 하나님보다 더 강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내 방법을 주장하고, 그래서 내 길이 옳다고 사람을 판단한다.


12.

야고보는 “경건하라”고 우리에게 주문한다.

그러면서 ‘정신 차리고 너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만 권위자가 아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법아래 살도록 지음 받은 사람에 불과하다.

그것을 아는 것이 경건이다.

그것이 바로 겸손함이다.  


13.

야고보는 가르쳐주는 경건에 이르는 열쇠 세 번째는 겸손함이다.

그리고 겸손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회복해야할 2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그 첫 번째는 기도의 회복이다.


약4:2~3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14.

일본이 낳은 세계적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우는 임종의 순간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입은 하나님의 은혜는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쁘고 감사한 것이 있다면 바로 저의 기도를 전부 들어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제가 한 기도 그대로를 하나님이 들어주셨다면 저는 제멋대로에다 교만하기 짝이 없고, 건방지기까지 한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의 영혼을 파괴하고 죄짓게 하는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오, 주님! 이것으로 인해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저의 온전한 기도만 들어주심으로 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15.

기도에 관해 관심있는 이들은 조지 뮬러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응답을 받은 기도는 자그만치 5만번이나 된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책, [5만번 기도응답받은 조지 뮬러의 기도 비밀]은 불티나게 팔렸다.

모두들 기도 응답을 받고 싶어 하고 조지 뮬러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받은 기도의 응답의 수에만 관심이 있지 그가 정말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가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낮추었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16.

미국의 종교학자가 “잘못된 기도교육이 자녀를 무신론자로 만든다”는 컬럼을 쓴적이 있다.

어릴 적부터 무엇이든 기도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자녀에가 가르친다.

아이는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한다.(자전거...)

부모는 그 자녀의 필요를 채워준다.

점점 부모의 능력이 한계에 달하자 자녀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17.

기도의 중점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다.

기도의 중심은 나의 의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

나의 요구가 아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느냐 아니냐로 기도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오류다.

기도를 통해 나의 생각이 얼마나 고쳐졌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당신이 누군가에게 피아노 사사를 받는다고 치자.

당신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스승이 코멘트를 해 주지 않겠는가?

당신은 그 스승의 코멘트를 듣는 것이 연주의 목적이지 스승이 나의 연주를 들어야 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막14:36,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기도는 어디에 중심이 맞춰져 있는가?

나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에 맞춰져 있는가?

아니면 나의 요구가 이루어졌는가 아닌가에 맞춰져 있는가?


19.

대화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대화는 땡깡도 아닌다.

대화는 가장 좋은 것을 찾아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때로는 나의 주장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기도의 회복이 곧 겸손의 회복이 되기도 한다.


20.

나의 위치는 하나님께 명령하는 자리가 아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유식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도 나의 위치는 여전히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리다.

겸손한 자는 기도가 바뀐다.

그래서 기도는 나의 겸손함을 드러내는 첫 관문이다.


21.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회복해야할 두 번째 이슈는 마음의 회복이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22.

이 말씀을 이어가려면 옛날 호세아 선지자 이야기를 해야 한다.

호세아의 이야기는 세상과 바람이 난 아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나간 아내를 찾는 남편의 지고지순한 내용이다.


23.

지난 주, 우리 목장모임에서 이 호세아 이야기가 나왔다.

한 집사님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 호세아 이야기를 들었단다.

세상과 바람난 아내를 찾아오면 또, 세상과 바람이 나고, 또 집을 나가고, 또 남편을 버리는 이야기를 듣다가 강사님이 이렇게 외치셨단다.

“에잇! 이제 포기했다. 더 이상 널 안 찾을거야!”

그러니까 청중들이 조용하다란다.... - 침묵이 흘렀다...

“그러셨다면 우리가 용서함 받지 못했겠죠....”라고 말씀하자 집사님이 그 조용한 청중 속에서 소리를 치셨단다.

“아이~ 깜짝이야...”

그리고 엉엉 우셨단다.

하나님 믿는다면서도 늘 세상과 바람이 나는 자신을 향해 하나님이 이제 그만 해야겠다고 하시면 어쩌나? 마음 조리다... 목사님 말씀에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얼마나 가슴이 짠한지...

 

24.

그런데 호세아는 단순한 지고지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너무 착하고 바람난 아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 나서지 않는다.

바람난 아내에 대해 분노와 질투로 찾지 않고는 못 베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경은 그 모습을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5.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빼앗겨도 아무렇지도 않고, 태평하다면 당신은 좋겠는가? 이해심 많은 상대를 만나서???

나는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니까...

만약 나에게 스승이 있는데 내가 공부하지 않고, 놀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태평하다면 당신은 좋겠는가? 이해심 많고 마음 넓은 스승이어서?

나는 그에게 배우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를 가르칠 간절한 마음이 없는 것이니까...


26.

나의 아버지는 어지간한 일로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자라나면서 어머니에게 혼난 기억이 딱 한 차례 있다.

청소년 시기에 나는 그런 부모님이 좋았다.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 같아서 좋았다.

물론 내가 다 잘 알아서 했던 사람은 아니다.

간섭받지 않으려 감추고, 속이고, 숨기려 노력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늘 간섭받기 싫어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다른 마음들이 많이 든다.

그 때, 나를 더욱 간섭하셔서 나의 문제를 고쳐주셨더라면...

그 때, 때려서라도 나의 습관을 고쳐주셨더라면...


27.

다 커서는 더욱 그랬다.

이제 잔소리나 간섭을 해 주는 사람들도 드물다.

진솔하게 나의 문제를 지적해 주는 이들보다는 입에 발린 달콤한 이야기로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물론 나도 그런 이야기를 더 좋아하고 편안해 한다.


28.

그러다보니 교회에서조차도 나를 책망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내가 세상과 결탁하고 있는 것을 소리치며 책망하는 것은 더더욱 싫다.

나를 위로하고 띄워주고 박수쳐 주는 소리에만 익숙해진다.

성경말씀도 가르침보다는 나의 주장을 정당화해 주는데 사용한다.


29.

그러나 기억하라.

하나님은 당신이 세상과 결탁하고 사랑에 빠진 것을 질투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당신의 두 마음에 분노하신다.

당신을 사랑하시기에 그분은 나의 마음에 간섭하신다.

당신을 사랑하시기에 그분은 나의 마음을 건드리신다.


30.

불편하더라도 간섭당할 때가 당신에게 은혜의 때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방주를 만들던 노아는 시시때때로 사람들을 찾았다.

그들에게 마지막 때를 선포했다.

어둡고 타락한 모습을 경고하고 삶의 문제들을 간섭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귀찮아하고 무시하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노아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 아픈 경고와 간섭은 마지막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아픈 경고와 간섭이 멈춘 날이 되었다.

그날은, 마지막 날이었다.


31.

아버지 마음을 아는가?

지금도 간절히 두드리고 간섭하고 아픔 경고를 주시는 그분의 마음을?

그래서 오히려 더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그분의 마음을 당신은 아닌가?

아버지의 아픈 경고를 들어라.

그 경고는 사랑이다.

울며 아픈 마음을 치유할 때가 은혜다.

마지막에는 그럴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당신이 겸손해진다.


32.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은 재정적 문제도, 사역도 아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을 눈뜨고 보는 것이 가장 어렵고 아프다.

그렇게 두드리는데도 꿈쩍하지 않는 이들을 보는 것이 가장 아프다.

어릴 적에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어느 때는 어머니와 목회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시는 말씀도 들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의지가 약하신 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나도 목회를 그만두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재정? 어려움? 명예? 자리? 아니다.

온전히 사람 때문이다.

내가 목사가 되던 그날 불편한 몸을 이끄시고 아버지가 오셨다.

그리고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10명 중 9사람이 반대를 해도, 1사람의 열매를 보고 포기하지 말아라.”

 

33.

질투하시는 아버지를 조롱하지 말라.

설마 하나님이 질투를 하시겠나? 

설마 하나님이 나를 이해 못하시겠나?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그래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만약 당신의 바람대로 하나님이 질투를 멈추는 그날은 당신에게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제발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라.

그것이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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