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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야고보서묵상

하늘의 것을 구하면 산다

[황홀한기다림4] 하늘의 것을 구하면 산다.

야고보서5:19~20,

19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 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20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1.

이번 주는 어린이날이 있는 주간입니다.

우리교회는 오늘 어린이 주일로 지키죠.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특별한 날로 지정해 기념한다는 것이 좀 우습습니다.

그래도 매일 살아있는 날이지만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과 같은 의미겠죠.

오늘 한 아이 한 생명을 안고 기도하다보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부모들의 인생을 제가 알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이 부모되신 것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아직 모르겠지만 그 부모의 자식 된 어린이 여러분들도 축복합니다.

가장 좋고 귀한 부모님들을 만나셨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에게, 부모는 어린이들에게 축복의 박수한번 하시죠.


2.

어떤 인생을 살던지 모든 인생은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직업, 어떤 형태의 삶도 가치가 있죠.

여러분이 어디에서, 어떤 형태의 삶을 살던 주님께는 다 귀한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굳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한 가지 삶의 형태가 있다면 저는 그 삶의 형태가 바로 부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이루는 삶의 형태는 주님이 바라시는 바이죠.

물론 저는 독신으로 사는 삶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저해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가정을 품은 삶의 형태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이유가 있죠.

그것은 바로 부모와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작게나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가만히 생각하면 혼자 다 큰 것 같죠.

그런데 아이들을 바라보면 부모의 손이 안 가는 데가 없습니다.

인생은 결코 혼자 크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내가 되어 있는 것은 누군가의 수고가 따랐다는 것을 알게되죠.

그래서 자식을 낳아보면 효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낳아보니 나도 이런 수고를 통해 자랐겠구나 싶기 때문이죠.


4.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를 돕는 주위의 수고가 결코 나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어린 아이가 요구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이 필요한지 어린 아이는 알지도 못하죠.

밥을 먹거나 무엇을 들려주거나 무엇을 보여주거나...

이런 것들을 아이들이 알아서 요청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부모가 더 잘 알죠.

지금 먹어야할 시간, 지금은 보여주어야할 시간들을 부모가 알아서 해줍니다.


5.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밥 먹이는 것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노르라고 먹을 것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부르시죠.

그래도 오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는 어머니가 밥 숟가락을 들고 쫓아다니며 먹이기도 하죠.

왜 이럴까요?

부모는 아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아이가 먼저 달라고 말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6.

시골에서 처음 서울에 올라와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잠깐 기숙사생활을 했는데요.

이런 이야기를 같이 생활하는 학생들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와 하숙집 아줌마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엄마는 말하지도 않는데 밥을 주지만 하숙집 아줌마는 밥을 달라고 해야 준다는 것이죠.


7.

대체로 아이들이 달라고 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사탕을 달라거나, 쵸콜릿, 과자 등을 달라고 보채죠.

그것들은 아이에게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 때문에 아이들은 울고불고 난리를 치기도 하죠.


8.

그러나 부모가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대부분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삼시세끼 밥을 챙겨준다거나 운동을 하고 씻기고 하는 것들이죠.

아이들이 자라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은 대부분 부모가 미리 챙겨줍니다.

아이들이 달라고 해서 챙겨주는 것이 아니죠.


9.

우리들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우가 이럴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없어도 되는 것들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태반이죠.

그에 반해서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들은 대부분 하나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산소는 우리가 기도해서 얻은 것이 아니죠.

우리가 금식기도해서 다음날 태양이 뜨는 것도 아닙니다.

철따라 피는 꽃과 열매들, 따스한 햇살과 촉촉이 대지를 적시는 비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아시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이미 주님이 다 주시고 계시죠.


10.

이것을 알아야 우리의 기도가 온전해 집니다.

하나님은 바로 부모와 같이 우리의 요구 이전에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요구 이전에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의 요구 이전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 사건을 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조르고 달래야 한 줌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정성과 헌금으로 마음을 사야 우리에게 복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죠.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마치 어머니가 자녀에게 모든 수고를 미리 다하듯 말입니다.


11.

이재철목사님의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라는 책에 보면 시인 구상선생님의 대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구상선생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세상이 온통 어둡습니다. 온통 흙탕물입니다. 이런 세상 한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래도 맑은 물을 계속 흘려보내야 합니다.”

“온통이 흙탕물인데 몇 방울의 맑은 물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리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작은 몇 방울의 맑은 물을 통해 하나님은 흙탕물을 맑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죠.”


12.

야고보기자는 이제 마지막에 와서 우리에게 꼭 하고자 하는 말을 합니다.

마치 야고보의 결론과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 말은 바로 20절의 말씀입니다.

약5:20,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13.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이유를 2가지 차원에서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는 ‘죄인의 그릇된 길을 돌아서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죠.


14.

사실 종교라고 하는 틀에서 기독교를 보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일단 종교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과 안위를 위한 정신적 양식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자신의 잘됨과 행복을 추구하죠.

이런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른 점은 그 다음이죠.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여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은 그래서 그릇된 길로 가는 이들을 돌이키도록 힘을 쓰는데까지 가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도하도록 말씀하셨죠.

물론 다른 종교에도 전도와 같은 포교활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포교는 세력화나 재산 증식에 더 비중이 있는 것이지,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전도는 아닙니다.


15.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까 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엄마와 하숙집 아줌마의 차이를 말입니다.

엄마는 그저 자식에게 밥 한끼를 먹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엄마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는 엄마는 없잖습니까?

오로지 자식의 잘됨, 자식의 올바름을 위해 일하죠.


16.

그리스도인은 세력화를 위해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의 그릇된 길을 가는 이들을 돌이키려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인내도 필요한 것입니다.

밥 먹지 않겠다 버티고, 땡깡 피우는 자식을 포기하는 엄마가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죄인들을 돌이키는 일에 인내가 필요한 것이죠.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아는 이들이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바뀔 때까지, 돌아설 때까지 도와줘야 하죠.


17.

또 한 가지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바로 그들의 죄를 덮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저는 머뭇거리게 되는데요.

왜냐하면 어쩌면 우리가 제일 듣기 싫은 소리일지 몰라서입니다.


18.

이런 것이죠.

공동체에서 가만히 지켜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과 치우는 사람...^^

가만히 보면 언제나 동일합니다.

버리는 사람은 늘 버리고, 치우는 사람은 늘 치우죠.

언제나 버리는 사람이 치우는 법은 없습니다.

늘 버리지도 않은 사람이 치우죠.

그런데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죠.

그 사람 때문에 깨끗해지니까요.


19.

문제는 치우기만 하는 사람은 좀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것도 아닌데 힘들게 수고를 하려니 당연한 것이죠.

사실 의무감이나 어떤 조건으로 아이를 키운다면 정말 못할 일입니다.

부모가 아닌 아이 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 고역인지 아세요?

잘 보았다 칭찬이 없으면 쉽게 서운해지고,

뭐라도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금방 그만두고 싶게 되죠.

그리고 쉽게 억울함을 느낍니다.

부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0.

그래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일을 어떤 조건이나 의무로 하면 당연히 억울함이 몰려오게 되어있습니다.

가령 이런 경우이죠.

남을 위한 봉사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구원과 복을 위해 한다면 억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남을 위해 일했는데 오히려 핍박을 받으면 억울하게 되죠.

누군가를 도왔는데 오히려 화를 내면 억울하죠.

남을 위해 청소했는데 오히려 더럽다는 소릴 들으면 억울하죠.

그것이 나의 사명이 아니라 조건이 되면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 사명이어서 인내하고 견디듯이,

그리스도인도 남의 죄를 덮어주는 것이 사명이어야 하죠.


21.

이재철목사님 책 이야기를 한 김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그분의 책 가운데 성숙자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성장교재로 사용했던 책이죠.

그 책에서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분도 어느 책에서 인용한 글인데요.

어떤 목사님이 미국엘 방문하게 되어 그 곳 집사님 댁에 머물렀답니다.

어느 날 파티에 초대받아 가시게 되었는데 남편집사님은 직장에서 바로 가시고, 아내집사님이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데요.

여집사님이 파티복과 멋진 목걸이로 치장을 하고 나오셨는데요.

목사님이 농담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데요.

“집사님, 그 목걸이 정말 진짜 같으네요.”

이 말을 하는 순간, 목사님이 아차 싶었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다른 말로 그 목걸이 가짜인데 진짜처럼 보인다는 말이기 때문이죠.

목사님은 큰 실수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말은 주어 담을 수 없었습니다.

집사님이 상처받았으면 어쩌나 싶을 때 집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래요.

“어머... 목사님, 이거 가짜인지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면서 만면에 미소를 띄시더란 겁니다.

알고보니 진짜는 집에 두고, 외출할 때는 가짜를 하고 나가신다는 거예요.

그때, 목사님이 깨달은 것이 있답니다.

“진짜가 있는 사람은 가짜라는 놀림에 결코 상처받지 않는구나!”


22.

상처를 잘 받는 저는 이 책을 읽을 때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상처받는 이유 가운데 첫 번째가 ‘진짜를 가지지 못해서’였기 때문이죠.

부자에게 가난뱅이라고 놀려도 부자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고, 부자이기 때문이죠.

기도하는 자에게 기도가 부족하다고 하면 상처받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가난한 이에게 가난뱅이라고 하면 상처가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에게 기도가 부족하다고 하면 상처 받습니다.


23.

의무감으로 근근이 다른 사람을 돕는 자에게 돕는 것이 부족하다고 하면 억울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가지고 돕는 이에게 사랑이 부족하다고 하면 오히려 마음을 다잡겠죠.

자식을 키우는 부모에게 자식 키우는 것이 부족하다고 해 보십시오.

자식을 더 잘 먹이라고, 

자식을 더 잘 가르치라고 해 보십시오.

상처 받는 이들은 적습니다.

순간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잘 먹이고, 가르치는 것을 놓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식을 키우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이고, 사랑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기 때문이죠.


24.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우리의 존재이유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존재 이유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존재 이유여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2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하신 그 다음의 말씀이 주는 의미는 더 큽니다.


26.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하늘의 것을 먼저 구하려고 하면 닥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내일 일이 걱정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이렇게 결정한 다음에 혹시 문제는 생기지 않을까?”

그 걱정으로 오늘 하늘의 것을 구하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에게 맡기라는 이 문학적 표현은 바로 내일에 되면 내일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표현이죠.


27.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이런 부모님들 계십니까?

오늘 내 자녀의 키가 1M인 것을 보고 안 자란다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부모 말입니다.

혹시 자녀가 지금 이 아이큐, 이 모습, 이 습관대로 있을 것을 걱정하는 부모 있습니까?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어린 자녀를 보면서 다 자랄 것이라는 확신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잘한 걱정으로 세월 보내지 말고, 기다리며 큰 꿈을 꾸십시오.


28.

자잘한 세상의 것에 나의 시선이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것을 바라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을 구하며 사십시오.

그래야 진정으로 우리가 삽니다.


골로새서3:1~3,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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