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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야고보서묵상

말씀을 행하십시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4] 말씀을 행하십시오.

야고보서1:19~27,    

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20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1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25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26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27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1.

설 잘 보내셨습니까?

올해 2015년은 여러분에게 특별한 한 해가 되길 빕니다.

각자 특별함의 의미가 다 다르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특별함의 의미를 이렇게 정했습니다.

특별한 사랑, 특별한 행동의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말입니다.


2.

사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분명히 특별한 삶이죠.

많은 이가 가는 큰 길을 벗어나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어찌 안 특별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큰 문이 아닌 작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찌 안 특별하단 말입니까?

자기를 위해서 남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사는 세상의 이치 속에서 

남을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행동이 어찌 특별하지 않겠습니까?

바쁜 일상에서 강도 만난 자를 돌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재물까지 쓰는 일이 어찌 특별하지 않겠습니까?


3.

엄밀하게 말하면 특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바로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죠.

여러분들은 2015년을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4.

저도 설에 시골엘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많은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어제가 아버님 기일이었기에 설에 함께 추도예배 겸하여 예배도 하였습니다.

누군가 케익을 사와서 3월에 태어난 이들을 위해 파티도 했고요.

저희 가족 가운데 3월에 태어난 사람이 근 10명에 가까웠습니다.

모처럼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는데요.

이번 설에 뵈니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어 계셨습니다.

이제 86세가 되셨으니 할머니도 한참 할머니시죠.


5.

제가 어릴 적에 어머니께서 제게 늘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막디이 모양 대답만 잘한다”

‘막디이’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다만 그 의미가 행동은 없이 대답만 잘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알아들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막디이’라는 말이 막둥이의 사투리더군요.

그러니까 막내들이 말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대답만 참 잘했던 모양입니다.


6.

그런데 문제는 그런 제가 마치 순종적인 아들이라고 생각해 왔다는 것입니다.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한 듯 했고, 또 별로 불편하지도 않았습니다.

늘 대답을 잘했고요.

그런 저를 보면서 부모님들은 칭찬을 해 주셨거든요.

저는 아들로 부모님 속을 그리 심하게 썩이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것 다 제 생각입니다만 대답도 잘했고, 말씀하시면 잘 듣기도 했습니다.


7. 

그런데 저의 바로 위 누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늘 대들고 대답하고 그러셨어요.

어머니가 속상하고, 힘들어 하시고 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왜 저럴까?” 했습니다.

그냥 한다고 하면 되는데 누님은 늘 왜 해야 하냐고 따지셨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말을 다 듣기는 했는데 어머니 말대로 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대답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이야기에 대꾸할 필요도, 불편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리 대들던 누님은 보면, 꼭 어머니가 시킨 대로 합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누님은 그 일을 꼭 하려는 생각으로 묻고 대들고 했던 것이죠.

물론 저는 할 생각조차 없었기에 묻지도 않은 것이고요.

그러면서도 난 내가 순종적이라고 생각했드랬습니다.


8.

이와 같은 말씀이 예수님의 비유말씀 중에도 있습니다.

마21:28~30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맏아들은 대답하기를 '싫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서는, 가지 않았다. 


9.

포도원 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맏아들은 ‘싫다’고 말했습니다.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도 맏아들은 일하러 같습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예”라고 대답하고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10.

말씀을 행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두 가지 행동을 제안합니다.

그 첫 번째는 말씀 앞에서는 나의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11.

약1:21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로 여러분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잘 아실 것입니다.

헬라어인 이 [로고스]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칭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같은 뜻이지만 의미가 조금 다른 헬라어 [레마]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로고스]가 객관적 실체의 ‘말씀’이라는 뜻이라면 [레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주관적인 말씀을 의미하죠.

아마 한번쯤은 다 들어보셨을 단어들일 것입니다. 


13.

그에 반해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는 좀 생소합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는 [미드바르]입니다. 

광야에서 훈련 받은 것을 기록한 책인 '민수기'는 '뻬 미드바르' 즉, "광야에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원하셨습니다.

이집트의 노예근성을 다 빼고 새롭게 태어나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택한 것이 바로 광야에서 훈련받는 기간입니다.


14.

이 [미드바르]에서 [다바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다바르]라는 단어의 뜻이 바로 '말씀'입니다. 

여기서 [드비르]가 나오고, 그 말의 뜻은 '지성소'입니다.


15.

결국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광야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땅에서 익숙해진 습성들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훈련이 필요하죠.

광야에서 모든 것을 끊고 하나님과 단독자로 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16.

지난주일, 저의 가족이 되는 가정에서 저녁식사를 나눴습니다.

그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논의차 불렀던 모양입니다.

급성장한 교회인데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목사님과 성도간의 분쟁이 생겼습니다.

목사님의 재정과 독단의 문제, 인격적인 문제들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교회 몰래 수십억짜리 집을 구입하거나, 부목사들을 때려 상해를 입히거나, 이런 일들을 바로 잡고자 조언하고 바른 말하는 교인들을 이단으로 몰아 인격살인을 하는 등의 문제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목사님 개인의 문제로 보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안타까워서 모임을 갖고, 기도하고 하다가 급기야 새로운 교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나온 모양입니다.

그 가족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17.

저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잘못을 논평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 교회 문제들에 대해 아픔을 나누자고 말을 꺼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가 그 가족에게 해 드린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18.

저에게 문의를 요청한 가족은 신앙이 깊고 건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교회를 위해서도 많이 기도하고 후원하는 분이기도 하죠.

인간적으로는 대단히 상식적이고, 사랑과 긍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에게 [당신은 환자일지 모른다]고 조언했습니다.

지금은 어떤 행동을 할 때가 아니라 치료할 때라고 했습니다.


19.

제가 환자일지 모른다고 말한 논지는 이렇습니다.

예전에도 그 교회 목사님의 행실을 똑같았습니다.

다만 지금은 드러났을 뿐입니다.

그런 분에게 수년간 설교와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 분의 가치관을 듣고 지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가 그간 듣고 본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마치 개혁적이고, 옳은 것 같은 생각으로 행동한들 똑같은 양태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마치 폭력적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가 같은 길을 걷듯이 말입니다.


20.

우리들은 다 환자입니다.

물질의 환자, 명예의 환자, 자존심과 이기심의 환자, 경쟁과 싸움의 환자들입니다.

지금 새로운 것이 보여도, 지금 옳은 것 같아도 여러분들 중심 가운데 병을 고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옳음은 결코 옳음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광야를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나를 먼저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들립니다.

헌 옷을 벗어야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벗지 않으면 들으려고 하는 것만 듣습니다.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욕심이 발동하는 부분만 들립니다.


21.

이미 저는 여러분들에게 바로 이 예배가 광야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지식과 지혜가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순종만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식과 지혜는 가나안(삶의 자리)에서 필요합니다.

온전히 가나안에서, 삶의 자리에서 옳은 길을 가려면 먼저 광야에서 나의 생각과 습관과 버릇을 다 버리고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22.

여러분들은 병원에 가 보셨을 것입니다.

병원은 삶의 자리가 아닙니다.

오로지 건강하게 삶의 자리에서 일하도록 여러분을 치료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의사의 말이 아닌 여러분의 판단을 따른다면 병은 고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똑똑하고 현실적이어도 거기서는 의사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정상적인 의사일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광야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예배의 자리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잘난 척하고, 하나님의 앞에서 아는 척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을 들으려면 먼저 내 지식을 버려야 합니다.


23.

교회에 오시면 먼저 기도하시죠?

그때, 무슨 기도를 하십니까?

여러분이 말씀을 읽기 전, 아침에 일어나 묵상의 시간을 갖기 전 기도하시죠?

그때, 무슨 기도를 하십니까?

그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과, 나의 상식을 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리게 하소서.”

제발, 주님과의 시간을 가지시면 이런 광야를 누리십시오.

탐욕에 들끓는 예배와 기도가 아니라 진정한 광야의 기도를 하십시오.


24.

말씀을 행하기 위해서 취해야할 두 번째 제안은,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명이라도 여러분이 돌볼 이웃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25.

야고보기자는 우리에게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약1:22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이어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경건한 사람의 정의를 내립니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26.

한 가정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 보고 마음이 부끄러웠습니다.

한 집사님 가정이 받은 사랑을 나누는 방법으로 입양을 결정했습니다.

가족들이 기도로 준비하고 모든 서류와 인터뷰를 거쳐 입양 적합 가정이 되었습니다.

보통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입양을 할 수 있는데 이 가정은 6개월 만에 아이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연결된 아이가 뇌와 척추에 장애가 생길지도 모르는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겁니다.

이 가정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포기할지에 대한 가족들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 중에 딸아이가 엄마에게 묻더랍니다.

“엄마, 내가 아프면 나 포기할거야?”

“엄마는 너 포기하지 않지... 널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을거야.”

“그럼 이 아이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잖아.”


27.

넉넉하지 않았던 이 가정은 입양을 결정했답니다.

그리고 입양 아이를 위해 아빠는 시간 외 근무를 자청하고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시간 외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데요...”

“오히려 긴장하고 나를 경건하게 지킬 수 있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우리 아들 이쁘지 않아요?”


28.  

경건은 세상과 담을 쌓고 나 혼자 기도하는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게 자신을 지키는 것은 생각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과 문제를 겪으며 이기는데서 나의 경건이 나오고,

유혹과 위험을 지나면서 견뎌내는데서 나의 경건이 나오는 것입니다.


29.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벽해지려면 우리의 손과 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30.

누구여도 좋습니다.

내가 돌보고 눈물 흘리며 기도할 이웃을 만드십시오.

가족 말고요.

돈만 보내면 되는 아프리카의 어린이 말고요.

그것은 그대로 하시고요.

여러분이 때론 귀찮고, 때론 고통도 받고, 때론 희열도 느끼게 되는 이웃 말입니다.

직접 여러분이 만나고 지켜볼 수 있는 이웃 말입니다.


31.

이 행동과 수고가 여러분들을 경건하도록 지키게 될 것입니다.

말씀드렸잖아요.

다림의 선생님들이 수서에만 오면 몸 매무새를 고쳐 맨다고요.

*어떤 목사님이 그러더군요.

연년생 자식 3명을 주신 것은 자신에게 성화를 이루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내가 돌볼 이웃은 나의 성화를 이룰 도구일지도 모른다.

여러분이 누군가의 보호자요, 돕는 자로 있을 때 여러분은 유혹에서도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돕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도우심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2.

용서하고 들어주십시오.

내가 아무도 돕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이웃이 되어 주지 않았는데 축복이 있었다면 그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라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축복을 축복으로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로소득 한 돈은 쉽게 잃듯이 그렇게 다가온 축복을 결코 축복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3.

우리의 기초를 반석으로 만드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꿈을 꾸면서 실천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과 발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이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것입니다.

나를 통로삼아 남의 발을 씻어주는 삶을 사는 것, 그것입니다.

수시로 광야에 서십시오.

광야에 서지 못하는 자의 판단과 결정은 위험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웃이 꼭 되십시오.

거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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