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야고보서묵상

참된 경건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흠 없는 경건 1] 참된 경건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2:1~13,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    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4    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8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

10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한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그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2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1.

지난 주 목요일, 씽씽마치합창단 공연이 있었습니다.

200석 가까운 객석을 꽉 매운 가운데 아름다운 공연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공연은 애니메이션과 합창단이 어울어진 무대였는데요.

사랑하는 마음과 자존감에 대한 성품을 주제로 한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2.

씽씽마치는 다림교육과 스튜디오마치가 함께 협업을 한 프로젝트입니다.

다림교육은 이 지역 어린이들의 교육불균형 해소와 아름다운 성품을 심어주고자 우리교회가 2010년에 시작한 비영리교육단체이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세운 기업은 아닙니다만 스튜디오마치도 우리교회 청년들이, 이 시대 어린이의 성품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음악과 애니메이션을 창작하고자 만든 예술그룹이죠.

그동안 다림교육에 성품음악을 제공하면서 역량을 키워왔습니다.

최근에는 서울시 청년 창업 우수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죠.


3.

이번 공연을 보면서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2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하나는 예쁜 아이들의 공연을 보면서 그랬고요.

다른 하나는 애쓰고 힘쓰며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여 세상을 밝히려는 스튜디오마치의 고군분투에 눈물이 났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려는 마음이 가상했기 때문인데요.

자신의 재능을 자신을 위해 써도 살기 어려운 세상인데 자신의 재능을 남을 위해 쓰겠다고 하는 이들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 헌신해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돈이 아닌 가치를 위해 헌신할 때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저는 공연을 보면서 이들이 끝까지 돈이 아닌, 가치를 위해 살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스튜디오마치가 자신의 재능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발휘하고 나누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서 세워나가는 것을 이 땅에 청년들에게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대학에 좋은 직장과 캐리어를 가지고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위해 거짓과 속임수, 각종 모략을 부끄럼 없이 행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연약한 빛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

이런 일들에 수많은 재정과 수고가 들어갑니다.

이 공연만 하더라도 제반 비용은 물론 수많은 수고가 더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밤새 일했습니다.

아이들과 관련도 없는 이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았고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일처럼 함께 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돌아올 것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고 이 일에 참여했습니다. 

단지 이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꿈꾸며 그저 최선을 다한 것이죠.

나는 이런 이들이 제 주위에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런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좋을텐데 여러분들이 있어 저는 참 행복합니다.


5.

공연 전날에도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의 간식과 선물을 포장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추억 한보따리와 함께 선물과 사랑이 듬뿍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돌발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 이렇게 퍼주고 거저주고 나눠주었는데 받은 이들은 과연 감사해 할까요?


6.

공연이 시작할 쯤, 선생님 한분이 제게 뛰어왔습니다.

이유인즉, 학생 학부모 중 한분이 ‘컴플레인’을 했다는 겁니다.

그분의 불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평일날 공연에 어렵게 왔는데 저녁이나 먹을 것도 안 주느냐?”

순간,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고 몇 분간 소위 멘붕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무슨 구호단체입니까?


7.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떨까요?

어려서 사랑받는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이 아이들이 이런 돌봄을 너무도 당연하게 느끼는 건 아닌가 하는 서운함이 생기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이 여기는 경향도 있습니다.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니까 더 까불고 말을 안들을 때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무시하는 것이죠.

어느 아이 하나 선생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거나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림의 선생님은 나를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고,

이렇게 모이면 다림에서는 나에게 간식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죠.

오히려 비싸고, 참여하기 힘든 합창단이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죠.

한번이라도 빠지면 다시는 들어올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면 달랐겠죠?

엄하고 무섭고 혼나고 했다면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8.

늘 이렇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세상입니다.

덮어주고, 이해해주고, 안아주는 사람들이 더 무시당하는 세상입니다.

오히려 따지고, 대들고, 싸우고, 무서운 사람들이 대접받지요.

9.

오래전 이사할 때의 일입니다.

이사할 때 미리 견적을 내고 값을 결정하듯이 그렇게 계약을 했습니다.

도움은 필요없다고 했지만 저는 열심히 나르고 도와주었습니다.

음료수도 챙겨드리고, 식사비도 드렸죠.

감사의 인사들을 나누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태도가 오전과 오후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점점 손은 느려지고, 쉬는 시간이 많아지고, 시간은 흘렸습니다.

급기야 차 한 대가 더 필요하다며 추가금액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규정들을 하나하나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필요하다던 차량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물건이 줄어서요? 

당연히 아니죠.

갑자기 신속해졌고, 이사는 그렇게 시간 안에 끝마쳤습니다.


10.

사람들은 따지고 소리쳐야 똑똑한 줄, 무서운 줄 압니다.

뭔가 지적하고 말해줘야 아는 줄 알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지난 수요일, 전도서 묵상하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힘 있고, 가진 자리 있는 이들이 하면 그른 일이어도 뭔가 뜻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힘 없고, 가난한 이들이 하면 옳은 일을 하여도 뭔가 틀려 보인다구요.

스타벅스가 커피를 5천원에 팔면 당연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작은 가게에서 커피를 5천원에 팔면 폭리를 취한다고 따지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죠.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11.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여러분의 수많은 땀이 담긴 헌금이 다른 이들을 위해 쓰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감사해 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교회는 돈을 내고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러분들에게 보답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더 나아가 거부하고, 무시하고, 욕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12.

우리교회는 지역사랑방을 만들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공간도 부족한데 지역사랑방이라니...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가 기도로 채운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교제 나누게 하고 싶습니다.

커피숍에 모여 수다를 나누던 이들이, 그 공간에 모여 서로 돕고 지역을 바꾸는 일을 꿈꾸게 하고 싶습니다.

이미 다림에 영향을 받은 지역 어머니들이 뭔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다문화가정의 어머니들을 돕고, 지역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어 합니다.

우리교회가 그 장을 열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지역에 그 공간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13.

그런데 그 공간을 마치 자신들의 것처럼 쓸지도 모릅니다.

더럽히고, 고장내고, 힘든 일들은 우리에게 떠 넘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임대하고 돈을 지불하는 공간인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어떤 생각이 드시죠?


14.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여러분은 응징을 꿈꿀지도 모르죠.

‘당장 돕는 것을 그만두자.’

‘감사를 모르는 것들은 받을 자격도 없다.’

‘왜 우리만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도 할 말은 하고 정당한 주장은 해야 해!’

이런 이야기가 우리 머리 속을 맴돌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과 싸우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겠죠.


15.

이런 우리의 생각이 정답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장면이 나옵니다.

나병환자들이 예수께 고침받기를 원하며 찾아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기쁨에 찬 한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돌아와 경배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7:19,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16.

그런데 이 말을 하시기 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눅17:17~18,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17.

나병에서 고침 받기 위해 온 사람은 1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예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린 이는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9명은 몸이 낫고도 감사는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괘씸할 때가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때문에 병 고치심을 멈추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려 다니실 때 구름 같은 군중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분이 병자를 고치시면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보기 위해서 앞다투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반대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손을 내밀고, 병을 고쳐주었지만 그가 억울하게 처형을 당할 상황에 빠졌는데도 누구하나 막고 나선 사람이 없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누구하나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괘씸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만하겠다”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본래 사랑이 그런 것입니다.

본래 선함이 그런 것입니다.

본래 그리스도인은 그런 대접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19.

알아주지 않는다고 아이에 대한 사랑을 끊는 부모는 없습니다.

상대가 알아주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 우리 안에 심기워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도리어 반대하고 탄압하고 억압해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없이 대하셨습니다.

믿는 자든지, 믿지 않는 자든지, 그분은 동일하게 은혜를 주시고 기다리십니다.

감사하는 자든, 비판하는 자든, 그분에게는 동일한 자녀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향해 더욱 빛나십니다.


20.

유대인의 교훈집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에게 옆집에 가서 칼을 빌려오라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웃집에서 칼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이번에는 그 집에서 반대로 칼을 빌리러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칼을 내주라고 했습니다. 

이 때 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아버지, 며칠 전 저 집은 우리에게 칼을 빌려주지 않았잖아요?”

이 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저 집에서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다고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복수’란다. 또, 저 집에서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빌려준다고 말하면서 빌려주면 이건 ‘증오’란다. 그런데 거절당했다는 것을 깨끗이 잊고 빈 맘으로 칼을 빌려주면 이것이 곧 긍휼이다. 너의 마음을 긍휼로 채우지 않으면 그 빈자리는 복수와 증오가 차지할 것이니 주의하거라.”


21.

긍휼은 이해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것에 이르는 행동입니다.

긍휼은 용서하는 것을 넘어 없던 것으로 해주는 탕감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긍휼이 우리를 구원했고, 살렸습니다.

그분의 긍휼이 십자가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긍휼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22.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자체하는 사람들이 선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기부와, 나눔과, 선교와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스도인들이 개독교란 소리를 들을까요?

바로 이 긍휼 때문입니다.


23.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봉사활동도 많이 합니다.

감사해하고 반응을 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을 줄듯이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냉담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곳에 그들은 손길을 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긍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기자는 기독교인들이 선한 행동과 나눔을 하지 않아서 행동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한 행함이란 바로 긍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사랑을 하는데 차별된 사랑만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나눔을 하는데 차별된 나눔만 합니다.

갈채와 박수를 받는 나눔은 하지만 냉담하고 반응 없는 나눔은 하지 않습니다.

지지하고 마음에 맞는 이들은 사랑하지만 내 편이 아닌 이들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긍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4.

반응이 없고, 반대하는 이들에게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 것이 긍휼입니다.

온전하고 참된 경건은 긍휼함을 잃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건을 소유한 백성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나를 환영하는 이든 반대하는 이든, 그 누구든 차별하지 않을 때 경건에 이릅니다.

여러분을 경건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마음, 그 긍휼을 품으십시오.

긍휼로 구원받은 여러분들은 긍휼로 다른 이들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경건이 자랍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