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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여호수아서묵상

여호수아서묵상일기 91 - 내 마음을 표현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수아서 22:10~12   그들이 가나안 땅의 요단 강 가까이에 있는 그릴롯에 이르렀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동쪽의 므낫세 반쪽 지파가 요단 강 서쪽 지역의 강가에 단을 쌓았는데, 그 단은 보기에 아주 큰 단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동쪽의 므낫세 반쪽 지파가 우리들이 있는 요단 강 서쪽 지역의 강 가까운 그릴롯에 단을 쌓았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 말을 듣고, 온 회중이 동쪽 지파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려고 실로에 모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24년 첫 한 주를 거룩하고 즐겁게 맞이한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이번 한 주가 우리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이것이 24년을 걷는 우리의 첫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첫 단추가 중요하고 처음 정한 방향이 중요하듯이 우리의 첫 주간은 24년을 사는 이정표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지난 한 주를 아쉽게 보내신 분들은 후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새날은 언제나 어제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롭게 하도록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우리의 오늘은 어제를 내일의 밑거름으로 만드는 능력이 될 테니까요. 그래도 오늘은 한 주간을 잘 지켜온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고 싶네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좀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아니, 지파들이 각자의 땅을 분배받고 이제 평화로이 돌아가는 단계에서 무슨 분열의 냄새가 나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습니다. 일단 오늘 본문 10절에서 22장 마지막인 34절까지의 내용은 조금 복잡 미묘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따져볼 것이 많은 본문들이죠. 개별적인 묵상의 내용들이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 세세한 부분을 다루기에 앞서 전체적인 맥락이 어떤 것인지를 우선 알아야 이해가 쉬울 듯해요. 그래서 이게 어떤 내용인지를 큰 틀에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르우벤과 갓, 그리고 므낫세의 반쪽 지파는 요단강 동쪽 지역에 이미 자리를 잡았죠. 그럼에도 서쪽 지역, 그러니까 가나안의 본토 정복 전쟁에 참여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땅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지파의 땅을 정복하는데 함께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복전쟁은 승리로 막을 내리죠. 그리고 여호수아의 축복을 받고 자신의 땅, 요단강 동쪽으로 떠나는 것이 오늘 본문 이전의 모습이죠. 그런데 이 두 지파와 반쪽 지파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 그릴롯이라는 곳에서 단을 쌓죠. 단을 쌓는다는 말은 제사, 오늘날로 굳이 바꾸어서 말하자면 예배드리는 장소를 뜻하죠. 그런데 이것을 보고 다른 지파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분노를 하죠. 왜냐하면 르우벤과 갓, 그리고 므낫세 반쪽 지파가 우상에게 예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단을 쌓는 일이 뭐가 문제일까 싶죠. 예배드리려고 제단을 만드는 것은 장려할만한 일 아닐까 싶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죠. 제사의 법칙을 적은 신명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단은 한 곳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죠. 이미 이스라엘은 실로에 하나님의 제단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다른 지파들은 그 사실을 아는 이 두 지파와 반쪽 지파가 다른 신의 제단을 쌓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렇다고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이 맞는 반응일까 싶죠? 여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전에 그런 예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 문화에 동화되어서 다른 제단을 쌓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잘못을 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였던 사실을 아는 다른 지파는 그것이 비단 단을 쌓은 지파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아야 했던 거죠. 

 

서쪽의 다른 지파들의 입장을 알아보았다면 단을 쌓은 동쪽의 지파들 입장도 살펴보아야겠죠? 동쪽 편 지파들의 의도는 이랬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을 섬기거나 반역을 할 생각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일부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단을 쌓았다는 겁니다. 당시 요단강은 그저 강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죠.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과 서가 나뉘는 것으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파들은 서쪽에 자리를 하죠. 이제 동쪽으로 건너가는 지파들은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구별될 것이 자명하죠. 그러다 보니 이후 세월이 흘러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자신들을 기억하지 못할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스라엘과 함께하고 영원한 이스라엘의 후손인지를 후대에 알리려고 단을 세운 거죠.

 

그렇게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훈훈하게 끝이 납니다. 세세한 묵상은 앞으로 해 나가기로 하고 전체적인 입장에서 오늘 제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는데요. 그것은 서로 입장차에 대한 해결 능력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의도가 분명히 있죠. 악한 의도보다는 선한 의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들이 다 알지는 못하죠. 간혹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한 일들은 남들도 다 알아줄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죠. 좋은 마음을 가지고 한 일인데 나쁘게 바라보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여기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도는 자신 아니면 모릅니다. 아니, 때론 자신도 의도를 잘 모를 때가 있죠. 그래서 설명을 해 주어야 합니다. 나의 의도를 잘 설명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도 친절이에요. 남이 나의 의도를 다 파악하고 대처할 것이라는 것은 오만입니다. 때론 그 오만이 남이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원망하고 미움으로 번질 때가 있죠. 그게 다 나의 친절이 부족해서 오는 오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조금 더 친절한 것입니다. 나를 조금 더 설명할 줄 알아야 하고, 내 의도를 조금 더 알려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다 알아주겠지' 하는 것은 배려가 아니죠. '말로 꼭 해야 해?'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말로 해야 합니다. 표현을 해야 하고, 뜻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도, 나의 뜻, 나의 감정과 억울함까지 다 표현하듯 말이죠. 주님은 다 아시지만 그래도 나는 예배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또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때 내가 새로워지기 때문이죠. 올해는 표현하고 사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내 사랑을 표현하고, 내 마음을 표현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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