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9. 06:59ㆍ묵상하는말씀/고린도후서묵상일기
고린도후서 5:4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주와는 다른 느낌의 날씨죠? 뭐라고 할까요? 늦가을의 정취라고나 할까요? 사뭇 분위기가 바뀐듯한 느낌입니다. 다들 이제 겨울을 준비하는 모습이네요. 겨울을 준비한다는 것은 이제 겨울을 기다린다는 뜻이겠죠. 다시 말하면 겨울의 부정적인 생각을 벗고 이제 겨울의 좋은 모습을 그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멀리서 겨울을 생각할 때는 추우면 어쩌나? 미끄러우면 어쩌나? 그런 걱정이었다면 이제는 멋진 겨울 옷을 생각하고, 재미있는 스케이트 놀이를 꿈꾸는 것이 바로 겨울을 받아들이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의 분위기를 바꾸면 똑같은 일도 다르게 받아들여지죠? 힘들고 귀찮은 현실이 아닌 나의 수고가 쓰여서 좋고, 끝끝내 이겨내는 과정이 있어서 좋은 나의 하루로 오늘을 받아들이는 여러분이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장막을 현실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힘겹고 감당키 버거운 현실 앞에서 탄식과 한숨으로 보내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죠.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조금 더 심오한 내막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것은 우리가 연약한 육체의 몸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대다수가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죠. 어쩌면 죽음을 바라고, 어쩌면 생을 포기하는 일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다고 느낄수록 현실도피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였죠? 한국에도 한참 종말론의 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사람들은 일상의 삶을 팽개친 채 삶의 끝을 준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죠. 바울 당시에도 잘못된 종말론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죠.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것'이라고 말이죠. 좀 쉽게 말하면 우리의 마지막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장막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집이 장막을 덮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여기서 저는 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이렇게 듣습니다. 우리에게 끝은 없다고 말이죠. 다만 시작만 있을 뿐이라고요.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무거운 짐을 들 수 있는 새로운 힘이 생기는 것이 정답이고, 괴로움이 거치는 것이 아니라 그 괴로움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덮고 채울 기쁨이 가득한 것이 우리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지휘자 금난새 씨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자신에게 철칙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있데요.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말이랍니다.
[Never Say NO!]
결코 안된다고 말하지 않겠다.
한 번은 자신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를 초청하겠다는 연락이 왔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케스트라를 초청하는 데 드는 최소한의 비용에 50%도 안 되는 비용으로 초청을 제안했다는 것이죠. 그 비용으로는 도저히 초청해 응할 수 없었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생물이 말을 걸더래요.
[Never Say NO!]
그래서 금난새 선생은 초청에 응하겠다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부탁을 드렸데요. 우리 오케스트라 단원이 50명인데 30명으로 줄여서 작은 규모의 오케스트라로 연주해도 되겠냐고 물었데요. 그랬더니 금난새 선생이 지휘한다면 다 좋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가장 적절한 인원으로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죠. 그랬더니 이후로 전체 단원의 연주를 듣고 싶다면서 100% 비용보다 더 많은 비용을 제시하며 또다시 초청을 하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연주회에 왔던 다른 단체 관계자들까지 초청의 대열에 가세했다고 해요.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금난새 선생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내 주머니에 있는 친구가 우리 오케스트라를 살렸다"라고요.
나 같으면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손해 보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부정적인 사고를 한번 하게 되면 유연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좋은 묘안이나 지혜들이 나오지 않죠. 안 된다는 말에는 그런 부정적인 힘이 있어요. 안 된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의 지혜와 자비는 굳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좋게 생각하는 것이 모든 해결책은 아닙니다. 내가 좋게 생각한다고 세상이 나에게 호응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좋게 생각하는 것의 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각에 지혜가 주어지고, 하나님의 생각이 흐르기 때문에 귀한 것이죠. 어떤 일이 있어도 좋은 상황으로 바라보고 해결책을 찾는 사람과 이미 틀렸다고 정한 사람의 반응은 완전히 다릅니다. 나의 생각을 열어놓는 방법, 그것이 좋은 생각이죠. 나의 생각이 하나님과 통하는 통로로 만드는 일, 그것이 바로 좋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면 어떨까요? 짐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가 아니라 더 짐을 지어도 감당할 수 있게 힘을 달라고 말이죠. 질그릇이 아닌 금그릇이 되게 해 달라고가 아니라 이 질그릇에 주님의 보배로운 말씀과 은혜와 축복이 끊이지 않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고통을 없애달라고가 아닌, 고통이 환희가 되는 기적을 달라고, 차고 넘치는 곡간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퍼 주어도 마르지 않는 곡간을 기도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안 된다고, 틀렸다고, 싫다고 말하지 마세요. 아니라고 말하지 마세요. 내가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그 위에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내가 자리를 펴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죠. 그렇게 나의 영과 생각과 마음을 주님께 열어놓는 우리 공동체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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