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7 - 이 땅에서 사는 삶도 중요합니다.

2022. 7. 1. 07:02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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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2~19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태풍이 와도, 그래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오늘 해가 뜨고 아침이 오고 우리에게 새로운 날이 시작됩니다. 많은 방해가 있어도 하루가 주어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죠. 우리의 오늘도 그럴 거예요. 순조롭지 않아도, 내 생각과 달라도, 심지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실수가 반복되어도, 그래도 오늘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을 먼저 기뻐하세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그냥 흘러가지만 선물로 여기면 감사하게 되니까요.

 

바울은 조금 더 강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강변합니다. 오늘 본문은 동어반복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말을 계속 반복해서 말하죠. 그만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강력한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바울의 강변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지죠. 일반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주장을 믿을 사람은 드물죠. 일반적 상식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주장하는 부활에 대한 강변은 일반 세상 사람들을 향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약 비신자들을 향한 메시지였다면 그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차근히 설명하고 이해를 도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모르는 자들에게 설명하고 가르치듯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마치 다그치고 분노가 섞인듯한 어투죠. 그 이유는 아마도 이 메시지가 고린도 교회 내에 부활을 믿지 않는 세력들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여러 교리적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행했던 교리는 영과 육의 분리를 주장하는 이들이었죠. 이것을 이원론이라고 하는데요.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서로 존재론적으로 대립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죠. 그들은 영적인 부분을 거룩하게 여기는 반면에, 육체적인 부분은 더럽고 추하게 여기는 경향을 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이시기에 영성을 중요하게 여긴 반면, 우리의 육체에는 죄만 쌓인다고 보았던 거죠. 이는 영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발전되어서 오늘날 기독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데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더러운 육신의 몸을 입고 부활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본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죠. 이를 가현설이라고 하죠. 이런 주장의 배경이 바로 영과 육의 극명한 분리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이들은 육체의 일들을 부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며 어떤 짓을 해도 괜찮다며 육체를 함부로 했죠. 이 때문에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이죠.

 

이 때문일까요?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 영적인 것을 강조하는 이들 중에는 물질적인 것, 특별히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삶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삶에 '세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영성'과 대립시키려 드는 경향이 있죠.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는 온갖 경건을 다 부르짖다가도 세상 일에는 또 온갖 탈법과 꼼수를 남발하기도 하죠. 그러면서 교회에 십일조 잘하고, 예배 출석 잘하면 끝이라는 사고가 만연합니다. 너무 극단적인가요? 물론 표현이 거칩니다만 그러나 기독교인들 가운데 하나님 일, 세상의 일을 구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치 교회와 선교는 거룩한 일이고 세상에 나가 돈 버는 일은 저급하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없지 않죠. 어떤 이들은 직장에서 성실히 일하는 것보다 선교사가 되는 일, 목회자가 되는 일이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삶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살도록 만드셨고 보내셨어요. 쓸모없고 더러운 '세상'이라면 우리가 태어난 자체가 저주 아닙니까?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일이 하나님의 벌은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이 땅에서 아름답게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 아닌가요? 우리가 그토록 부정하는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진짜 영적인 삶은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행복하게 사는 삶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주님의 뜻대로 회복시키고 살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일이 우리의 사명인지도 몰라요. 그러니 지금 내가 사는 삶을 축복하세요. 내 직장, 내 학교, 내 사회와 국가, 그리고 모든 민족들을 축복하세요. 내가 일하는 것, 돈을 버는 일, 말하고 만나고 사귀고 함께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허락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듯이 우리의 시간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모든 시간과 장소, 모든 상황과 환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입니다. 우리는 지옥에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살아요. 우리가 사는 이 시간은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사는 이 땅의 삶을 축복하세요. 기쁘게 사세요.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예배입니다.

 

 

 

 

H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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