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6 -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2022. 6. 30. 07:00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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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9~11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이렇게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꿀꿀한 날씨가 계속되네요. 어둡고 컴컴한 하늘에서 비바람도 거셉니다. 그렇다고 이런 날이 계속될 것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분들은 안 계실 거예요. 구름이 낀 하늘은 언젠가 갤 것이고, 무섭게 불던 바람도 잔잔해질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죠.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내일을 믿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한없으셔서, 보지 못하는 사이에도 임하시고, 잠자는 사이에도 일하시는 분이기에 반드시 새로운 기회가 다시 있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오늘이 잘 사는 오늘이죠. 비록 비 내리는 오늘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마치 밝고 맑은 날처럼 더욱 환한 마음으로 사는 우리 되길 빕니다.

 

바울은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합니다. 팔삭둥이라고 하나요?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여덟 달 만에 태어난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죠. 요즘에야 인큐베이터 같은 것들이 있어서 위험성이 덜하지만 옛날에는 매우 위험한 출산이었죠. 그래서인지 팔삭동이라는 표현은, 좀 덜 성숙한 아이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바울이 실제 팔삭둥이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는 자신을 은혜로 산 존재로, 혹은 부족한 자신이 받은 긍휼에 대한 언급으로 겸손을 드러내고 있죠. 

 

게다가 그는 지금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죠. 그런데 이게 과거가 있잖아요?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가두고 죽이는 열열한 유대교 주의자로 사냥꾼 역할을 했던 자입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어땠겠습니까? 머리라도 들 수 있었겠어요? 그런데도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지금의 자신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죠.

 

나의 나됨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은 최상의 겸손이자 최고의 찬양이기도 합니다. 어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가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 은혜의 고백으로 채워진 오늘의 본문에서 유독 새롭게 눈에 띄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10절 중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분이 다 하셨다는 고백과는 마치 상반되는 듯한 이 구절이 제가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주로 주님의 은혜나 주권을 고백할 때 나의 할 일을 극히 제한하기 때문이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다 해 주시기를 바라는 우리의 심보가 있죠. 그런데 바울은 그와는 다른 접근을 합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라고 선언하죠. 왜 안 그렇겠습니까? 늦게 시작했고, 심지어 이전에 적대감으로 훼방은 물론 회유와 겁박, 죽이기까지 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일을 하려면 죽어라 열심히 일해야겠죠. 

 

마태복음서에 보면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가 나오죠.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일꾼들과 계약을 맺고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포도원 밖에서 일을 못 찾아 서성이는 이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들도 고용을 하죠.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 심지어 해가 지는 오후 5시에도 일꾼들을 고용하죠. 그리고 커다란 문제의 장면이 나와요. 그 모든 일꾼에게 품삯을 줄 때 똑같이 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은 화를 내죠. 엄연히 일한 시간이 다른 데 같은 품삯을 주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때 포도원 주인이 이렇게 말하죠.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그리고 이 비유를 마치시며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남깁니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이들을 공평하게 보시는 은혜, 부족한 자들조차 품으시고 더 귀하게 보시는 은혜만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대하며 이 비유가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그것만이  은혜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것은, 늦게 온 일꾼들의 태도입니다. 성경은 그 부분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래요. 늦게나마 일을 하게 된 그들은 어떻게 일했을까요? 그게 저라면 아마도 늦은 만큼 더 많이 일하고 부지런히 하지 않았을까요? 다른 이들보다 늦었으면 미안해서라도 더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잘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요? 재미있게도 성경은 일찍 온 일꾼의 속마음 하나를 비춰줍니다. 그들은 나중 온 사람보다 자신들이 더 받을 것을 생각한 거죠. 그러니까 그들은 나중 온 사람들을 구별해 냈고, 그들보다 자신이 더 긴 시간, 더 많은 일을 했다고 느끼고 있었던 거죠. 비교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비교 우위에 있다면 그들의 태도는 어땠을지 감이 오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바울의 잘못은 명백했습니다. 너무 유명했기 때문에 더욱 그 잘못은 도드라졌죠. 게다가 거기서 지도자의 역할을 한다는 자체가 말도 안 될 정도였습니다. 아마 저 같으면 얼굴도 들지 못했을 거예요. 그뿐입니까?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겠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열심히 일했어요.

 

무언가 잘못한 일은 수치입니다. 잘못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죠. 그런데 잘못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으로 인해 좌절에 빠지는 것이죠. 내 잘못으로, 숨고 사라지고 피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잘못을 되새기며 괴로워하고, 사람들을 피하고, 사회를 등지는 일이 더 큰 문제입니다. 잘못해서 용서를 구하지 않고 도망가버리고 회피해 버리는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바울은 제게 잘못이 오히려 열심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네요. 내 잘못을 용서받았다면 더욱 열심을 다해 일하고 싸우는 것이 은혜받은 자의 본분이라고 말이죠.

 

잘못된 습관으로 살았어도 괜찮습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늘 부정적이고, 잘못된 마음으로 늘 굳은 마음 일색이었어도 괜찮아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 잘못이 깊을수록 우리는 새로운 은혜로 나아가는 힘이 더욱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고 고개 숙이며 살지 마세요. 오히려 죄인이기에 더 큰 은혜로 더 넓고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기억하세요. 지금껏 잘못된 것을 바꾸기 위해 더욱 열심으로 살아가는 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실 주님의 은혜를 나의 열심이 빛나게 하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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