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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10 - 기쁘고 감사한 일이 슬프고 아팠던 일을 이기며 살아야 합니다.

삼하 19:1~8 왕이 목놓아 울면서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소문이 요압에게 전해졌다. 그래서 모든 군인에게도 그날의 승리가 슬픔으로 바뀌었다. 왕이 자기의 아들 때문에 몹시 슬퍼한다는 소문이, 그날 모든 군인에게 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군인들은, 마치 싸움터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 부끄러워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슬며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도 왕은 두 손으로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큰소리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하고 울부짖었다. 마침내 요압이 집으로 왕을 찾아가서 항의하였다. "임금님, 모든 부하가 오늘 임금님의 목숨을 건지고, 임금님의 아들들과 딸들의 목숨도 건지고, 모든 왕비의 목숨과 후궁들의 목숨까지 건져 드렸습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는 오히려 오늘 부하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임금님을 반역한 무리들은 사랑하시고, 임금님께 충성을 바친 부하들은 미워하시는 겁니까? 우리 지휘관들이나 부하들은 임금님께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들입니까? 임금님께서는 오늘 임금님의 본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차라리 오늘,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모두 죽었더라면, 임금님께서는 더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이제라도 일어나 밖으로 나가셔서, 임금님의 부하들을 위로의 말로 격려해 주십시오. 제가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만, 지금 임금님께서 밖으로 나가지 않으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임금님 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님께서 젊은 시절부터 이제까지 당한 그 모든 환난보다도 더 무서운 환난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일어나서 성문 문루로 나와 앉았다. "임금님께서 성문 문루에 앉아 계신다!" 하는 소식이 모든 부하에게 전해지니, 모든 부하가 왕의 앞으로 나아왔다.


보다 못한 요압이 나섭니다. 모든 군대가 다윗의 태도를 보고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죠. 전쟁을 승리하고도 그들은 마치 패잔병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슬퍼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을 상대로 싸운 자신들이 마치 죄인이 된 기분이죠. 다윗은 지금 뭘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기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들이 죽었으니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런데 이는 전쟁이지 않습니까? 만약 아들의 죽음을 그리도 바라지 않았다면 전쟁에 나서지 말았어야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어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이를 요압이 지적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왕의 자리라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사로이 자신의 생각과 뜻만을 고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의 권위가 하늘을 찔러도 때론 자신의 뜻과 생각을 접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 때론 고개를 숙을 때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걸음을 늦춰 천천히 가야 할 때도 있고, 벅차게도 빨리 뛰어야 할 때도 있죠. 자기 뜻대로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뜻대로만 한다면 그것이 독재자이지 않겠어요? 그 조화를 잘 이루어야 성군이 되는 거죠.

이는 왕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내 감정, 내 생각을 늘 고집하고 내 기분에 따라 행동하고 말한다면 어찌 함께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처지가 있고 생각이 있습니다. 앞뒤 정황이 있고, 스토리가 있죠.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고 함께 하지 않으며 자기의 감정대로만, 기분대로만 결정하고 움직이면 누가 친구 될 수 있겠어요.

세상에 나와 딱 맞는 친구는 없습니다. 내 뜻과 기분에 딱 맞는 세상은 없어요. 일단 내가 일관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기분이, 생각이, 뜻이 늘 변하는데 어찌 그 기분을 딱딱 맞춰주는 친구나 환경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부리는 종이나 노예도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가려야 하죠. "무엇이 중한디?"라는 영화 대사처럼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 우리는 늘 더 중요한 것을 가르고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 거죠. 가족으로 살다 보면 늘 기분에 맞을 수는 없죠. 서로 다른 기분 탓에 언쟁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가족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상처 때문에 가족이라는 혈연을 끊는 경우는 드물죠. 왜냐하면 그 받은 상처보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더 깊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으나 또 회복되고 또 기쁜 일들을 기대하는 거죠. 상처보다 크게 나를 생각하고 나와 함께하는 그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를 받고 기분이 상할 때에도 그보다 더 큰 사랑과 기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그런 실수들을 많이 합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상대방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무엇을 더 주고 싶고, 무엇을 더 나누고 싶어 하죠. 자기는 못 먹어도 사랑하는 이에게는 더 주고 싶어 합니다. 시간도 아끼지 않아요. 밤중이라도 필요하면 튀어 나가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수고를 마다치 않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오히려 자기가 힘들기를 바라며 발도 동동 구르고요. 아프다 하면 새벽잠을 설쳐가며 달려가기도 하죠. 그런데 그런 관계가 단 한마디 말실수로 깨지기도 합니다. 사람이 완벽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세상은 공평해요. 그렇게 수고와 열정을 아끼지 않는 사랑이 많은 사람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때론 말을 참 못 해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은 생각 없이 나오죠. 때론 사람은 진국인데 표현을 못해서 알지 못하는 경우도 수두룩합니다. 보면 정말 헌신적이고 열정적인데 무뚝뚝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죠. 말은 때깔 나게 잘하는데 마음이 없어요. 행동은 안 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그 두 사람밖에 없다면 여러분은 누구 더 좋으신가요?

단적인 예입니다만 우리는 그런 와중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수고와 사랑을 다하는 그 마음인가요? 아니면 내게 상처를 준 그 말 한마디인가요? 그 말 하나로 그동안 나에게 했던 헌신과 수고와 사랑은 송두리째 바꾸실 건가요? 아니면 그 헌신과 사랑으로 말 한마디를 덮어 주실 건가요? 정말 무엇이 더 중요하신가요? 우리에게도 영적인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99번 잘하다가 1번 실수하면 끝입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기준으로 대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살아남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기쁘고 감사했던 일이 슬프고 아팠던 일을 이기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은 불안 투성이, 불만투성이일 겁니다. 그저 그렇게 불만 많은 인생으로 사는 것이라면 그나마 낫습니다. 감사했던 일은 잊고 아픈 기억만 남은 인생은 불행해집니다. 친구도 없고, 누군가 도와줄 이들도 주위에 없어지기 때문이죠. 주위에서도 늘 불안하게 곁을 지킬 겁니다. 언제 기분이 상할지, 어떤 포인트에서 감정이 상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여러분 친구들을 보면 그런 사람 있잖아요.

'제한텐 뭔 말을 못 하겠어~''툭하면 삐지고 툭하면 화내고 툭하면 기분이 상하니 어떻게 말해야 해?'

그런 친구와는 거리가 좀 생기죠? 말도 조심하고 편안하지 않죠? 그러니 깊은 관계가 될 수도 없죠? 차라리 친하지 않으면 관계도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죠? 만약 내가 그런 친구라면 어떻겠습니까? 공과 사를 구분 못하고 툭하면 자기감정대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그동안 했던 사랑과 수고는 한순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기 상처와 아픈 것만으로 평가하고 결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 곁에 있을 수 있겠어요?

구분하며 사십시다. 기쁘고 감사했던 일이 한순간 실수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동안 보살피시고 지켜주신 세월의 감사가 한순간 아픔과 괴로움보다 훨씬 값져요. 그 감사를 잃지 말아야 상하는 감정도 사라집니다. 그 기쁨의 시간을 기억할수록 아픔의 상처도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의 감정이 상하는 일, 상처를 받는 일을 사라지게 만들 방법은, 내 주위에서 그런 아픔을 주는 일들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내 안에 그 아픔보다 감사와 기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상처의 늪에서 구원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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