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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15 - 사람의 중심은 긍휼입니다.

삼하 19:31~40   그때에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도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왕이 요단 강을 건너는 일을 도우려고, 요단 강 가에 이르렀다. 바르실래는 아주 늙은 사람으로, 나이가 여든 살이나 되었다. 그는 큰 부자였으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왕에게 음식을 공급하였다. 왕이 바르실래에게 말하였다. "노인께서는 나와 함께 건너가시지요. 나와 같이 가시면 내가 잘 대접하겠습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얼마나 더 오래 산다고, 임금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습니까? 제 나이가 지금 여든입니다. 제가 이 나이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어떻게 가릴 줄 알겠습니까? 이 종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신들, 그 맛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노래하는 남녀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들, 제가 이 나이에 잘 알아듣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종이 높으신 임금님께 다시 짐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이 종은 임금님을 모시고 요단 강을 건너려는 것뿐인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이러한 상을 저에게 베푸시려고 하십니까? 부디 이 종을 돌아가게 하셔서, 고향 마을에 있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곁에서 죽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대신에 이 종의 아들 김함이 여기에 있으니, 그가 높으신 임금님을 따라가게 하시고, 임금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에게 잘 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왕이 약속하였다. "물론, 내가 김함을 데리고 가겠소. 그리고 노인께서 보시기에 만족하도록, 내가 그에게 잘 대하여 주겠고, 또 나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드리겠소." 드디어 온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넜고, 왕도 건너갔다.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복을 빌어 주니, 바르실래가 자기의 고장으로 돌아갔다. 왕이 길갈로 건너갈 때에 김함도 왕을 따라서 건너갔다.


시므이와 시바, 므비보셋에 이어 이번에는 바르실래가 등장합니다. 바르실래를 기억하실까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초라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그를 배웅하며 필요한 생필품을 제공했던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던 인물이죠. 사무엘하 17장에 보면 그는, 침대와 이부자리와 대야와 질그릇뿐 아니라, 다윗 일행이 먹을 수 있는 많은 밀과 보리, 콩 등 각종 곡식과 꿀과 버터, 양고기와 치즈도 가져다주었다고 하죠. 아마도 그는 그 지역의 이름난 부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풍성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할 수가 없었겠죠. 그래서 그의 행동이 더욱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부자란 땅을 차지하는 지주였을 텐데요. 그가 다윗을 돕고 지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이후 압살롬의 통치하에서는 살아남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자라고 이렇게 나누는 일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눈다는 것은 자신이 가졌기에 베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의 나눔은 부자여서가 아닙니다. 그 마음의 긍휼, 즉 측은함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죠.

 

삼하 17:29   그들은, 그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굶주리고 지치고 목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꿀과 버터와 양고기와 치즈도 가져다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이 측은지심이 없으면 나누지 못합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이 측은지심이 있으면 그는 무엇이라도 나누는 사람이 되죠.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긍휼함은 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거나 어떤 겉과 다른 계략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는 점이죠. 이것이 이전에 등장한 시므이나 시바와 비교되는 것이죠.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함께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청하죠. 아마도 그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말년을 편하게 모시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자신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그야말로 미래를 담보할 수 없이 목숨을 내놓고 도와준 이가 아닙니까? 어찌 안 고맙고 안 감사하겠어요. 평생을 모셔도 다 갚지 못할 고마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런데 바르실래는 이를 거절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뭔가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자신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했을 뿐이니까요. 마음에 측은함을 견딜 수 없었을 뿐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을 지녔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또 보상을 바라고 행하는 행동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의 음성대로 움직이는 것이 긍휼이죠. 끝까지 긍휼이죠. 바르실래는 오히려 다윗을 따라나섬이 다윗에게 짐이 될 것임을 밝힙니다. 그것까지 긍휼이죠. 남을 위한 삶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반드시 하나님이 기억하시죠. 다윗이 죽을 때 아들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벌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죠? 잘못을 온전히 뉘우치지 않으면 그 잘못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반면, 성경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솔로몬에게 남긴 다윗의 유언 가운데 바르실래에 대한 유언도 있었습니다. 바르실래의 자녀들을 솔로몬의 상에서 함께 먹는 가족이 되게 하라고 말이죠. 

 

사람의 중심은 긍휼입니다. 측은지심이고 역지사지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원함도 바로 그분의 긍휼을 따라가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함도 바로 긍휼 때문이죠. 그 긍휼은 잊히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잊어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새겨집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중심이 바로 그 긍휼이기 때문이죠. 그 긍휼로 살고 그 긍휼로 죽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의 긍휼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우리의 긍휼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끌어오는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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