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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19 - 우리의 조바심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흉기입니다.

삼하 20:4~10   왕이 아마사에게 명령하였다. "장군은 유다 사람을 사흘 안에 모아 나에게 데려 오고, 그대도 함께 오시오."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갔으나, 왕이 그에게 정하여 준 기간을 넘겼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새에게 명령하였다.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도 더 우리를 해롭게 할 것이오. 그러므로 장군은 나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를 뒤쫓아 가시오. 혹시라도 그가 잘 요새화 된 성읍들을 발견하여 그리로 피하면, 우리가 찾지 못할까 염려되오." 그래서 요압의 부하들과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과 모든 용사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 가려고, 아비새를 따라 예루살렘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기브온의 큰 바위 곁에 이르렀을 때에, 아마사가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요압은 군복을 입고, 허리에 띠를 띠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칼집이 달려 있고, 그 칼집에는 칼이 들어 있었다. 요압이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나와 있었다. 요압은 아마사에게 "형님, 평안하시오?" 하고 말하면서,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턱수염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요압이 다른 손으로 칼을 빼어 잡았는데, 아마사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요압이 그 칼로 아마사의 배를 찔러서, 그의 창자가 땅바닥에 쏟아지게 하니, 다시 찌를 필요도 없이 아마사가 죽었다. 그런 다음에 요압은 자기 동생 아비새와 함께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 갔다.


조용한 아침입니다. 어둑컴컴한 창밖에 하나둘씩 불빛들이 켜집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뜨겠죠?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아도 또다시 기회의 시간들이 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며 하루를 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야기는 다시 세바의 난을 진압하는 다윗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다윗은 아마사에게 군대를 모을 것을 명령합니다. 세바의 난을 진압할 군대겠죠? 아마도 다윗은 아마사에게 반란을 진압할 사령관의 자리를 맡길 모양입니다. 아마사가 누구입니까? 다윗 가문의 사람이었지만 압살롬의 반란에 참여해서 다윗을 공격하는데 최전선에 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한 다윗은 탕평책의 일환으로 그를 중용하죠. 그리고 그 선언을 현실에 옮깁니다. 

 

그런데 아마사는 모병에 실패한 듯해요. 다윗이 정해준 기간을 넘겨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없는 관계로 추측만 할 수 있는데요. 아마도 백성들이 호응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아마사의 과거가 발목을 잡았던 것 같아요. 다윗은 그를 용서하고 중용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반란군의 중심이었던 것을 기억했던 것이죠. 배신자라는 오명에 그의 명령이 먹히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 이런 가능성도 있어요. 그것은 아마사의 능력의 문제입니다. 그는 압살롬 반란군의 사령관으로 진두지휘를 했지만 요압 군대에 대패를 했습니다. 그것을 기점으로 압살롬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죠. 다윗의 편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반대편에서는 그의 무능력을 탓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아마사는 그리 전략적으로나 능력면에서 딸렸던 것 같아요. 그러니 요압 등 라이벌들이 그의 승진을 곱지 않게 보았던 것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아마사는 일 처리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에요. 다윗은 아마사가 늦자 조급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비새를 부르죠. 결국 자신의 심복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바의 난 진압을 맡기죠. 다윗의 조급함과 염려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의 말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렇게 아마사가 아닌 아비새로 왕의 마음은 바뀌고 말았어요. 아직 아마사가 현장에 있는데도 말이죠. 결국 사령관이 두 사람이 된 셈이죠. 혼란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러니 아비새의 입장에서 아마사를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실각한 아마사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 같은 아마사였는데 이들은 아마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다윗의 마음이 떠났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니 죽이죠. 그러니 무시합니다. 요압의 칼에 아마사는 처참히 죽습니다.

 

분명 요압의 복수였습니다. 반란군의 수괴였고 역적이었기에 목숨을 걸고 싸워 이겼는데, 그런 인물이 자신보다 더 인정받는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어찌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무엇을 하든 더 뛰어나고 공이 많은데 자신보다 더 잘나가는 아마사가 어찌 아니꼽지 않았겠습니까? 요압은 아마도 칼을 품고 오늘이 오기를 바랬을지 몰라요. 분명 요압의 살인이고, 분명 요압의 욕심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이고 끝없는 욕망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 처참한 살인의 현장에 다른 범인이 있습니다. 이 무도한 범행의 진짜 살인자가 있습니다. 그가 누굴까요?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조급함과 조바심이 진짜 살인자입니다. 물론 급박하고 촌각을 다투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미 반란의 쓴맛을 본 적인 있는 터라 트라우마가 있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맡겼으면 믿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믿었으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죠. 기도하고 확신했으면 이루어지는 과정을 함께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의 조바심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조바심과 초조함으로 밤잠을 설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될 일마저 망쳐버리는, 걱정과 염려로 분위기를 흐리고 판단력마저 잃어버리는 우리의 모습 같아요. 

 

맡겼으면 믿으세요. 기도했으면 기다리세요. 절박할수록 숨을 고르고 주님께 평안을 간구하고, 촌각을 다툴수록 평정심을 찾으며 주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시길 빕니다. 염려한다고 키를 한자라도 자라게 할 수 없는 우리입니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쁠수록 더 조용한 시간을 만들고, 조급할수록 더 평강의 예배가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의 조급함은 생각보다 날카로운 칼입니다. 우리의 조바심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흉기입니다. 조급해질 때 오히려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조바심이 몰려올 때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예배하세요. 나를 인도하는 것은 조바심이 아니라 평강이어야 하고, 내가 결정하는 힘은 조급함이 아니라 평화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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