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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14 - 우리에게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삼하 19:24~30   그때에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도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 그는, 왕이 떠나간 날부터 평안하게 다시 돌아오는 날까지, 발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았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이하니, 왕이 그에게 물었다. "므비보셋은 어찌하여 나와 함께 떠나지 않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 저는 다리를 절기 때문에, 나귀를 타고 임금님과 함께 떠나려고, 제가 탈 나귀에 안장을 얹으라고 저의 종에게 일렀으나, 종이 그만 저를 속였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임금님께 가서, 이 종을 모함까지 하였습니다. 임금님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은 분이시니, 임금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처분하시기를 바랍니다. 제 아버지의 온 집안은 임금님에게 죽어도 마땅한 사람들뿐인데, 임금님께서는 이 종을 임금님의 상에서 먹는 사람들과 함께 먹도록 해주셨으니, 이제 저에게 무슨 염치가 있다고, 임금님께 무엇을 더 요구하겠습니까?" 그러나 왕은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어찌하여 그 이야기를 또 꺼내느냐? 나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어 가져라!" 므비보셋이 왕에게 아뢰었다. "높으신 임금님께서 안전하게 왕궁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는데, 이제 그가 그 밭을 다 차지한들 어떻습니까?"


기회주의자인 시므이와 시바의 간사함에도 다윗은 그들을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의 너그러움을 넘어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다윗을 배신했던 이들이 두려워한 것은 돌아온 다윗에 의한 보복이었습니다. 당연하겠죠? 왕을 배신했으니 이게 어디 가벼운 죄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다윗이 돌아오는 것을 쉽게 결정하지 못했었죠. 그러나 일부 반대자들, 특별히 유다 지역의 민심을 얻어야 했던 다윗으로서는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겠죠. 그래서 그는 탕평책을 쓰는데요. 반대자의 중심이었던 아마사를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반대자들을 끌어안는 정책을 시행합니다. 시므이와 같은 이들에 대한 처벌을 미루는 것 또한 그런 전략의 일환이었을 거예요. 세상에 가장 미운 사람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사람이죠. 어찌 밉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다윗이 죽음을 앞둔 와중에도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시므이를 처벌하라고 했으니 그의 마음에는 죽는 날까지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던 미움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그는 더 큰 일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묻어 두죠.

 

그런 시므이, 시바와는 다른 또 한 사람이 오늘 등장하죠.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입니다. 그는 다윗의 배려로 원수의 집안 혈족이었으나 왕족으로 대우받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는 다윗이 어려움을 당할 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윗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는 다윗의 도망길에 나타나야죠. 다윗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 수많은 인파 가운데 므비보셋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럴까요? 섭섭한 마음이 올라오는 와중에 그의 종이던 시바가 나와 므비보셋의 험담을 하자 그냥 넘어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보이스 피싱에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가 있죠. 전화상에 들리는 내용은 정말 허접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들이죠. 그런데도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멍청하거나 어리숙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죠. 가족이 다쳤다거나 혹은 어떤 불상사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으면 우리의 이성은 마비되거든요. 마치 동물들이 맹수 앞에 서면 사지가 굳어 버리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 꼼짝을 못 하는 거죠. 운동선수들도 그렇죠. '지겠구나' 생각이 들면 경기가 잘 안 풀립니다. 외부의 공격보다 무서운 것이 우리 안에 품은 생각이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을 오해하고 기분이 상하고 미움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 안에 두려움, 혹은 섭섭함 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건강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죠. 내 감정이 건강하지 못하면 쉽게 섭섭함이 생기고, 오해가 생기죠. 다윗이 그랬을 거예요. 아들에게 쫓겨 도망자 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가 황망했을 것이고, 그런 상황이 혼란스러웠을 테죠. 그때 우리의 감정은 한없이 나락으로 빠집니다. 문제는 그 감정의 나락에 속삭이는 음성이 있다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힘든데 저 사람은 태평해?''내가 아픈데 한 번도 연락이 없는 거야?'

 

아시다시피 므비보셋은 다윗이 도망자의 신세가 되자 마치 아비를 잃은 자식처럼 몸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깍지 않은 채 간절한 기다림의 시간을 갖죠. 그런 므비보셋의 마음을 다윗은 까맣게 알지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므비보셋은 처절한 기다림의 시간을 갖는데 다윗은 므비보셋이 편안히 잘 먹고 잘 살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겠죠? 그래서 어떤 판단과 결정은 내가 건강할 때, 나의 감정이 평안할 때 비로소 해야 하죠.

 

그래도 다윗을 칭찬하고픈 대목이 오늘 있습니다. 그것은 므비보셋에게 왜 그때 나오지 않았는지 물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다윗은 마음속에 므비보셋에 대한 오해를 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바로 물어봤겠죠? 그 질문에는 원망과 책망이 담겨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에 칭찬을 하고픈 이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이 한 오해로 모든 결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주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심하죠.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의 감정이 내린 결론을 과신하는 경우가 많아요. 직접 해명을 듣거나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죠. 그래서 한번 판단이 끝나면 기회가 있어도 묻지를 않아요. 이미 감정이 상해버렸으니까요.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다윗은 용기를 내 물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자기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용기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 결정, 내 오해를 풀겠다는 표현일지도 모르죠. 깨진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잡고자 함일 수도 있죠. 우리가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죠.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요. 각각의 표현들에는 다 이유가 있고, 행동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을 나누며 깊이 교제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아요. 드라마에 보면 엇갈리는 운명들이 있잖아요? 그렇게 내가 만나지 못했고 보지 못했다고 안 오고 없었던 것이 아니듯 우리의 판단과 생각 너머의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가 필요하죠. 나눔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깊고 오랜 나눔이 말이죠. 어찌 수년의 세월을 몇 분의 만남으로 판단할 수 있겠어요? 믿음을 가지고 깊은 나눔을 꾸준히 해가다 보면 그곳에 이해와 인정이 드러나고 용서와 감사가 피어오르죠. 

 

꾸준히 묻고 답하며 교제하세요. 섣부른 결정보다 먼저 물어보세요. 책망이나 가르침보다 먼저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감정을 쏟기 전에 먼저 궁금한 것을 물어보세요. 내 판단을 확인시킬 대화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알 수 있는 그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내가 쉽게 생각하고 판단한 것들보다 훨씬 많은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들,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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