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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18 - 사실보다 조금 더 좋게 보는 눈을 가지세요.

삼하 20:3   다윗은 예루살렘의 왕궁으로 돌아온 뒤에, 예전에 왕궁을 지키라고 남겨 둔 후궁 열 명을 붙잡아서, 방에 가두고, 감시병을 두었다. 왕이 그들에게 먹을 것만 주고, 더 이상 그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죽을 때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냈다.


좋은 아침입니다. 한주를 시작하는 이 아침을 웃음과 넉넉한 마음으로 시작하시길 빕니다.

 

오늘 본문은 짧습니다. 그런데 생각할 것들이 많네요. 다윗이 왕으로 복귀하자마자 세바의 반란이 일어나죠. 또다시 다윗에게는 시련이 닥친 모양새입니다. 그동안 흔들렸던 왕권을 다시 복원하기도 전에 일어난 반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반란으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었던 터라 이번에는 초기에 진압할 필요성이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다급히 다윗은 진압에 나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와중에 등장하는 한 사건을 다루고 있죠.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왕궁을 떠날 때 그의 후궁 중 10명을 왕궁에 남겨 놓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왕궁을 지킨다는 목적이었죠. 이는 지난 15장 말씀에 기록되어 있죠. 그런데 그들이 큰 수모를 겪었습니다. 압살롬이 욕보인 거죠. 이는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궁들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의 선택이 타의라면, 왕의 명령에 의해 사지에 내몰린 비참한 사람들이었고, 자의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왕궁을 지킨 용감한 일꾼들이었죠. 그런데 그들을 다윗은 붙잡아 방에 가두고 감시를 붙였습니다. 마치 감옥에 가둔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죠. 오늘 본문의 뉘앙스를 보면 사뭇 부정적으로 그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와 같은 시각으로 이 장면을 읽는다면 다윗의 처사가 온당해 보이지 않아요. 아마도 다윗의 그런 행동은 그들이 압살롬에 의해 수치를 당한 때문인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가 누구 때문입니까? 다윗이 왕궁에 남겨놓은 때문 아닙니까? 사지에 몰아세운 때문이 아닌가요? 그녀들이 다윗의 후궁인 것을 아는 이상, 다윗을 꺾으려는 반란군들은 그녀들을 가만히 두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어떤 경우든 그녀들에게는 큰 피해가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들은 그저 힘없는 피해자일 뿐이죠. 그런데 그녀들을 죄인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 때문인데요? 무엇 때문인데요? 마치 자기가 그렇게 시켜놓고 이제와서는 나 몰라라 하는, 아니 그보다 더한,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처사는 정의롭지 못한 모습이죠.

 

저는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다윗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며 이 구절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구절로 눈길이 넘어가질 않았어요. 왜냐하면 자꾸 다윗이 왜 그랬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다윗은 왜 그녀들을 가두고 감시하며 죽을 때까지 갇혀 살게 했을까요? 

 

일단 다윗이 후궁들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율법의 규례를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24장에 보면, 이혼과 재혼에 관한 율법이 나오는데요. 첫째 남편과 이혼한 부인이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이나 이혼을 했을 경우, 다시 첫 번째 남편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들을 후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생각해보면 어쨌거나 아들과 얽힌 문제 아닙니까? 압살롬의 폐륜적 행동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윗이 그녀들을 다시금 후궁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못한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저에게 새로운 묵상이 주어졌습니다. 이상하리만큼 이런 사건에서는 늘 문제를 여자에게서 찾는 버릇이 우리 사회에 있습니다. 특히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더욱 그렇죠.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건 여자 탓이라는 거죠.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자가 더 조신해야 하고, 여자가 더 잘 지켜야 한다는 태도가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잘못을 남자가 했어도, 남자가 완력으로 짓밟아도, 잘못은 다 여자에게 있다는 몰상식한 시각이 여전합니다. 당시에는 경우야 어찌 되었든 성적 피해를 당한 여자들은 모두 손가락질 대상이었습니다. 집안에서 쫓겨났고 거리에서는 돌에 맞기까지 했죠. 이 열 후궁의 경우는 심지어 모든 사람 앞에서 수모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말이죠. 이는 오늘날 리벤지 포르노라고 일컬어지는, 당사자의 동의나 인지 없이 배포 확산되는 영상물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입에 올리며 비웃고 비아냥되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몰라요. 그런 입장이 된 이들은 숨을 곳이 없습니다. 오늘날이 그럴진대 당시 그녀들은 어떻겠습니까?  어디서 살 수 있을까요? 누가 돌보겠습니까? 

 

이 생각에 이르자 저는 다윗의 행동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가장 그들을 위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그녀들을 가둔 것은 있을 곳을 마련해 준 것이고, 감시병을 붙인 것은 보호를 해 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죽을 때까지 먹을 것을 주며 돌보았고, 그들과 동침하지 않은 것은 그녀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의 생각이 짧거나 왜곡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다윗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성경의 기록자는 이 부분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다윗의 생각은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다윗이 어떤 마음이었든 저는 좋게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들을 내쫓아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게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이 거리에서 돌에 맞지 않게 한 것만으로도 생명을 살려준 것이기 때문이죠. 뒷걸음질하다 쥐 잡은 소일지라도 저는 다윗의 행동을 좋게 볼래요. 그래야 제 마음이 조금은 편할 것 같으니까요. 그래야 미워하는 마음으로 아침을 채우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보실까요? 아마도 그분은 우리의 중심을 꿰뚫고 계시겠죠? 그분의 눈에는 팩트만이 존재할 거예요. 그분을 속일 수 없고, 그분을 피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죠. 그럼에도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좋게 봐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분이 따르는 것은 팩트가 아니라 긍휼이기 때문이죠. 우리를 좋게 봐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삶을 유지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분의 심판이 팩트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을지 몰라요. 그럼에도 그분은 늘 좋은 눈으로, 기대로, 기회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의 팩트보다 더 가치 있게, 훌륭하게 평가하시죠. 그 은혜로 우리는 오늘을 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눈이 필요해요. 사실보다 조금 더 좋게 보는 눈, 실제보다 조금 더 낫게 여기는 마음, 팩트보다 조금 더 넓게 이해하는 긍휼이 우리에게 흐르길 바랍니다. 그런 넉넉함이 이 아침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흐르길 빕니다. 그렇게 오늘을 붙잡으며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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