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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13 - 회개에도 격이 있습니다.

삼하 19:15~23   다윗 왕이 돌아오는 길에 요단 강 가에 이르렀는데, 유다 사람들이 왕을 맞이하여 요단 강을 건너게 하려고, 이미 길갈에 와 있었다. 바후림에 사는 베냐민 사람으로 게라의 아들인 시므이도 급히 와서, 다윗 왕을 맞이하려고, 모든 유다 사람들과 함께 내려왔다. 그는 베냐민 사람 천 명을 거느리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와 함께 왔는데, 시바도 자기의 아들 열다섯 명과 자기의 종 스무 명을 다 데리고 나아왔다. 이들은 요단 강을 건너서, 왕 앞으로 나아왔다. 그들은 왕의 가족이 강을 건너는 일을 도와서, 왕의 환심을 사려고, 나룻배로 건너갔다. 왕이 요단 강을 건너려고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임금님, 이 종의 허물을 마음에 두지 말아 주십시오. 높으신 임금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떠나시던 날, 제가 저지른 죄악을, 임금님께서는 기억하시거나 마음에 품지 말아 주십시오. 바로 제가 죄를 지은 줄을, 이 종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오늘 요셉 지파의 모든 사람 가운데서 맨 먼저 높으신 임금님을 맞으러 내려왔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그 말을 받아서, 왕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을 시므이가 저주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시므이는 죽어야 마땅한 줄 압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하였다. "스루야의 아들들은 들어라. 나의 일에 왜 너희가 나서서,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내가 오늘에서야,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 같은데, 이런 날에,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처형을 받아서야 되겠느냐?" 왕이 시므이에게 맹세하였다. "너는 처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의 정치력이 빛을 발합니다. 이스라엘에 이어 유다의 백성들까지 다윗의 복귀를 환영하고 나서죠. 이제 다윗은 돌아옵니다.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오죠. 그런데 이 길에서 오늘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시므이와 시바입니다. 이들의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죠? 지난 본문 16장에 등장했던 인물들이죠. 그러니까 다윗이 도망가던 길에 등장했다가 다윗이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 왕과 가까워 한때 한 가락 했던 시므이는 다윗에게 돌까지 던졌습니다. 다윗을 저주하고 침을 뱉었죠. 물론 다윗으로 인해 몰락한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다윗의 몰락이 즐거웠을지도 모릅니다. 시바는 어떤가요? 사울 왕의 손자인 므비보셋을 모시며 그의 재산을 관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위기에 몰라고 혼란한 틈을 타서 자신의 주인인 므비보셋을 모함하며 그의 재산을 자신이 탈취하려고 이간질을 시작했었죠.

 

그러던 이들이 상황이 다시 반전되자 태세를 순식간에 전환합니다. 시므이는 사람을 천 명씩이나 끌어모아 환영인파를 만들었고, 시바는 전 가족이 나와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합니다. 그리고는 다윗 앞에 엎드려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빌죠. 한마디로 모두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역겨웠으면 장군 아비새가 그 자리에서 당장 목을 치자고 다윗에게 요청을 했겠습니까? 사람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재빠른 자기의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신세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여기서 회개와 용서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시므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압니다. 당연하겠죠.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니까요. 아마도 그는 다윗이 패망하고 압살롬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여겼을 테니까요. 다윗에 대한 억하심정도 있었겠지만 압살롬이 집권을 하면 다윗에게 저항하고 돌을 던지며 저주했던 자신의 행동이 용감하게 치장될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또한 처세의 기본적인 발상이었겠죠. 시바 또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혼란한 틈을 교묘히 이용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또 한 번 태도를 전환하죠. 그리고 용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회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회개에도 격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는 것 자체가 회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회개의 이유가 무엇인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죄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화살이 과녁을 빗나갔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죠.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회개입니다. 잘못된 길을 돌이켜 반드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는 것이 회개죠. 그래서 그 회개에는 과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말씀의 과녁, 하나님의 뜻의 과녁이 필요하죠. 그곳을 향해 우리는 부지런히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격이 다른 회개를 할 때가 많아요. 가령, 어린아이들이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말할 때를 봅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잘못했다고 하죠. 이유는 혼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는 자기의 잘못을 시정하려는 시도는 없습니다. 그저 혼나지 않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오지 않기를 원할 뿐이죠. 이 또한 또 다른 기회주의로 다르지 않습니다.

 

혼나지 않으려고 드리는 예배, 부정 타지 않으려고 하는 선함, 어떤 특별한 유익의 목적이 있어서 드리는 기도, 이것이 본래의 의미를 잃은 또 다른 기회주의적 신앙이 되지 않기를 빕니다. 우리의 회개는 나를 바로잡는 시도입니다. 이는 심지어 자신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 아픔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추구하는 시도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간절함이고요. 때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변화를 꾀하는 결단입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회개로는 정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에는 기적도 없어요. 상황에 의존한 회개는 계속 반복될 뿐입니다. 격이 다른 회개가 필요합니다. 순간의 유불리가 아닌 평생의 소원을 담은 회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는 회개,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의 회개, 그 회개의 자리에서 은혜의 꽃이 피고 새롭고 산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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